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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풍경 속에 이야기를 품다! 해남 대흥사·강진 무위사·영암 도갑사
풍경 좋은 곳에는 절집들이 있다. 이 나라 명당에는 죄다 절집들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이름난 산은 그 명성에 걸 맞는 절집들을 거느리고 있다. 대흥사가 그렇고, 무위사와 도갑사도 다르지 않다. 대흥사는 ‘구림구곡(九林九曲)’ 넘어 두륜산에 자리잡았다. 무위사와 도갑사를 품은 곳은 산세 좋기로 정평이 난 월출산이다.세 절집은 다르지만 사실 한 몸이다. 모체인 대흥사(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에서 가지를 뻗은 것이 무위사와 도갑사다. 무위사와 도갑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다. 절집들이 세상에 존재한 시간이 천 년을 넘었으니, 세 절집에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쌓였다. 절집들이 지나온 시간의 마디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꺼내 읽는다. 재미가 쏠쏠하다. 아주 오래 전 할머니가 이부자리에서 전해주던 옛날이야기 같다.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절, 대흥사가을, 대흥사 입구는 나무들이 꽃보다 화려하게 빛난다. 주차장에서 대흥사에 이르는 숲길은 물경 2㎞다. 아홉 굽이 숲길로 이어져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불린다. 길 양 옆으로 떡갈나무, 측백나무, 편백나무가 가득하다. 그 너머엔 동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숲 터널이다. 동백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가 몸을 뒤섞으며 울창한 산림을 형성한다. 숨을 깊게 쉬면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다.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언 위에 떠있는 절이다. 서산은 서천으로 지며 ‘만세불훼지지요, 삼재불입지처’라 했다.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고, 화재·인재·수재가 닥치지 않을 곳이란 의미다. 실제로 신라 말기에 창간돼 별다른 변고를 겪지 않았다. 그 덕에 유명인사들이 쓴 현판이 죄다 남아 있다. 정조대왕이 ‘표충사’, 추사 김정희는 ‘무량수각’, 원교 이광사는 ‘대웅보전’, 이삼만은 ‘가허루’ 현판을 썼다.대흥사엔 절집에 흔한 사천왕상이 없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세울 필요가 없었다. 북으로 영암 월출산, 남쪽엔 송지 달마산, 동으로 장흥 천관산, 서쪽에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다. 사방에서 산들이 액운을 막아주는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에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대흥사의 꽃은 1000개의 불상이 모셔진 천불전이다. 6년의 시간 동안 경주 옥돌만을 써서 정성으로 만든 천불상을 봉안하고 있다.대흥사는 한국에서 13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우리 불교문화의 깊이를 담고 있는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다. 함께 등재된 절집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이다.무위사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무위사절 이름이 크다. 무위(無爲)는 불교에서 이르는 최고선의 경지다. 무소유, 텅 비어서 가득 채워져 있는 해탈을 지향하는 절이다. 절 이름처럼 가람의 배치도 심상치 않다. 높지 않은 계단들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절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구조다. 무위사 가는 길은 그래서 진리를 찾아 내딛는 걸음 같다.신라 진평왕 39년(617)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전하니 1400년의 시간을 견뎠다. 절집을 태우면 사리가 몇 가마는 나올 세월이다. 진정한 무위는 타인과 더불어 해탈하는 것이다. 무위사의 다른 이름은 수륙사(水陸社)로 저 옛날 수륙재(水陸齎)가 절의 상징이었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혼을 부처님의 불법으로 환생시키는 의식이다. 나만 잘 살면 의미 없으니 더불어 잘 살자는 뜻을 담았다.무위사의 핵심은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다. 서방 극락정토를 현생에서 묘사했는데 작고 소박하며 단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배흘림기둥을 썼다. 기둥은 배가 불룩하고 위 아래로 갈수록 잘록해진다. 무척 과학적인 건축기법이다. 기둥은 밑에서 보면 두께가 갈수록 좁아 보인다. 또 멀리서 보면 무거운 지붕에 눌리는 느낌으로 약해 보인다. 지붕 중간을 부풀려 건축물이 매우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다. 단아하면서 안정되고 기품 있는 무위사 극락보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극락보전은 벽화로도 유명하다. 원래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476에 완성된 것이다. ‘아미타 삼존벽화’와 ‘백의관음도’는 두루마리가 아닌 토벽의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가장 오래 된 후불벽화다.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 불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은 불교미술의 정수다. 극락보전 앞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기교 없이 담백하고 단아한 모습이 극락보전과 닮았다.구름으로 창을 삼고, 안개로 문을 삼는 절집, 도갑사도갑사는 재미있는 전설 하나를 떠받치고 있다. 신라 말(880년)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원래 도갑사 자리엔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도선의 어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주워 먹고 임신을 했다. 처녀가 임신했으니 지탄받을 게 뻔했다. 아이를 숲에 버렸는데, 이게 웬걸, 비둘기들이 아이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다. 도선의 어머니는 문수사 주지에게 아이를 맡겨 키웠고, 장성한 도선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지었다.도갑사는 들어서는 길부터 위엄을 만난다. 해탈문인데, 국보 제50호다. 1457년 도갑사가 중건될 때 공사를 시작해 1473년 완공됐으니, 5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겨냈다. 해탈문에는 한 쌍의 금강역사와 문수보살 동자, 보현보살 동자가 서 있다. 현재에 다시 만든 것인데 원래의 문수보살 동자와 보현보살 동자는 도갑사 성보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금강역사 한 쌍만 해탈문을 지키다가 도둑맞아 되찾지 못했다.도갑사엔 ‘월출산 갤러리’가 있다. 절과 그림의 만남이 조화롭다. 원래는 절에서 일하는 보살님들의 처소였는데 작가들에게 내주었다. 갤러리에서는 항상 전시회가 열리고, 절을 보러 왔다가 그림에 취한 방문객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도갑사엔 절이 지나온 시간과 기품을 인증하는 비가 하나 서 있다.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인데, 2004년 보물로 지정됐다. 비 하나를 세우는데 무려 21년이 걸렸다. 빗돌이 도갑사로 오기까지의 긴 여정이 비문에 적혀 있다. 익산 땅 여산에서 채석해 황산 선박장에서 배에 실려 군산 칠산포를 거쳤다. 서호 앞바다에서 배를 내려 도갑사까지 이송했다. 두 사람은 도갑사의 모체다. 도선국사는 절을 창건했고, 수미선사는 무너진 절을 중건했다. 비문에 영의정 이경석은 도갑사를 두고 이렇게 썼다. “구름으로 창을 삼고, 안개로 문을 삼아 어렴풋이 나타나는 열두 누각이 있고, 물소리에 염불소리, 바람에 깃발소리에는 광명이 흘러나와 삼천 세계를 비추었다.” 절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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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아서 ‘별’이 된 나무들 강진 백련사 동백숲·해남 성내리 수성송·영암 월곡리 느티나무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죠. 정말 그럴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정말 우연처럼 맞아떨어지는 숫자가 하나 있어요. 현재 지구의 인구는 80억 명입니다. 이제까지 지구에 살다간 사람의 숫자는 얼마인지 아세요? 1000억 명 정도입니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의 별이 1000억 개입니다. 지구에 살았던 사람들이 죽어서 모두 별이 돼 ‘우리 은하’를 만든 건 아닐까요?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오래 산 것들은 왠지 슬픕니다. 별이 그렇지요. 정말 오래 살아남은 나무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자리에서 500년 혹은 1000년을 산 나무들은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할까요? 아마도 자기 등걸을 만지며 오래 된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의 숨결을 지금도 제 안에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해질녘 별이 뜰 때 그 나무와 별을 번갈아 보면 사람과 한 몸처럼 느껴집니다.‘강해영’엔 오래 살아서 ‘별’이 된 나무들이 있습니다. 백련사 동백은 세 번 핀다죠. 나무에서 한 번, 꽃모가지째 우수수 떨어져 땅에서 한 번, 마지막은 슬픈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한 번, 피었다 진답니다. 해남 성내리 수성송은 500년 동안 해남읍성 사람들과 함께 걸어걸어 왔습니다. 그 걸음, 별의 행로처럼 길고 아름답습니다. 나무에 금줄이 둘러쳐져 있는 영암 월곡리 느티나무는 당산목이자 마을의 수호신입니다. 500년도 넘게 마을 사람들의 삶과 정성을 지켜왔습니다.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 백련사 동백숲그 거 아세요? 별이 없었다면 사람도 나무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뼈 속에 있는 칼슘 같은 원소들은 별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별이 죽으면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갔습니다. 별이 없었다면 수소나 헬륨 같은 무거운 원소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람과 나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도 나무도 별의 자식이고요, 결국 원래 한 몸입니다.백련사 동백숲에 서면 나무가 모두 별이란 걸 알게 됩니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1,500그루 동백나무들이 늦겨울부터 이른 봄 사이, 일제히 꽃을 피워냅니다. 동백이 피면 산이 연등을 내건 것도 같고, 무수히 많은 붉은 별들이 빛을 밝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4월부터 꽃이 일제히 지면 땅 전체가 붉어집니다. 어떤 꽃들은 졸졸 흐르는 물 위로 떨어져 별처럼 떠다니기도 합니다. 그 모습들이 유성우처럼 장관입니다.동백꽃의 꽃말은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깊으면 꽃잎 한 점 한 점이 아닌 꽃모가지째 뚝 떨어져 땅에 잠들 수 있을까요? 목숨처럼 그 누구를 사랑한 꽃들이 백련사엔 가득합니다. 동백나무 주변으로 숲길이 잘 다듬어져 있어 걷기에 아주 편합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동백나무숲은 초의선사와 다산이 자주 함께 거닐던 유서 깊은 숲길입니다.다산은 동백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그 화품(花品)은 적으나 잎은 겨울에도 푸르고 붉은 꽃이 많이 달린다.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면 윤기가 나고 아름답게 보이므로 부인들이 소중히 여긴다. 정말 훌륭한 꽃나무이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을 춘백이라 한다.’ 어느 봄, 백련사에서 꽃이 지면, 사람의 마음에 동백이 핍니다.성(城)을 지키다!, 해남 성내리 수성송해남의 중심은 수성송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동헌 앞에 서 있었고, 지금은 해남군청 광장에 버티고 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습니다. 사람이 늘 붐비는 곳에 높이 15m, 거대한 나무가 해남의 ‘랜드마크’처럼 우뚝합니다. 200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성송은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 흔하게 자라는 해송입니다.이름이 독특합니다. 수성(守城), 그러니까 성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수성송의 시간은 명종 10년(1555)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해 봄, 왜적이 전선 60여 척을 이끌고 해남 달량진을 침범합니다. 을묘왜변인데요, 남쪽 성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달량진이 함락되고, 며칠 후 조선 육군 총사령부였던 병영성이 적의 손에 넘어갑니다. 강진성과 장흥성을 차례로 함락한 왜군은 군사를 나눠 해남읍성과 영암읍성으로 향합니다.고립무원 해남읍성에서는 현감 변협(邊協)이 겁에 질린 백성들을 다독여 전투 태세를 갖춥니다. 변협은 무너진 성벽을 일으켜 세우고, 성 주변에 복병을 배치한 뒤 기습작전으로 왜적을 막아냅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을묘왜변 최초의 승전보였습니다. 조정은 해남현감 변협의 공을 높이 사 장흥부사로 승진시킵니다. 변협은 이것을 기념해 동헌의 앞뜰에 해송을 심었는데, 그 소나무가 바로 수성송입니다.성을 지킨 나무, 500년을 이어온 해남 백성들의 목숨이 수성송 아래에서 자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500년 동안 지지 않는 별, 영암 월곡리 느티나무어떤 나무들은 너무 거대해서 보고 있자면 경외의 마음이 생깁니다. 무척 오래 살아서 나무가 저 혼자 생각하고, 말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월곡리 느티나무가 그렇습니다. 500년을 넘게 살았으니 그 나무 안에 시간의 강이 흘러도 몇 개는 흘렀을 것이고, 사람의 터무니가 몇 만 개는 화석처럼 박혀 있을 겁니다.198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나무의 키는 23m, 하늘을 향하던 시선이 한참을 뻗어야 나무가 오롯하게 담깁니다. 펼쳐진 가지는 그보다 더 큽니다. 큰 기둥에서 11개의 크고 작은 가지가 뻗었는데요, 남북으로 25m, 동서 방향으로는 무려 29m나 됩니다. 그늘도 그만큼 넓어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에게 편안한 쉼을 제공합니다.월곡리 사람들에게 느티나무는 신이고, 조상이며, 오랜 친구입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느티나무를 중심에 두고, 풍악놀이를 했습니다. 나무 둘레엔 항시 금줄을 매달고, 극진한 마음으로 마을의 안녕을 빌었고요.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던 곳도 늘 느티나무 아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그 나무 위를 아이들은 기어올라 웃고 떠들며 시간의 강을 무사히 건넜습니다.월곡리엔 500년 동안 지지 않는 별이 마을 입구에 서서 사람의 길을 환하게 비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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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힐링’이 핀다! 강진 다산 남도 유배길·해남 달마고도·영암 기찬묏길
도시생활 각박하고 힘들다. 어떤 날은 시멘트 도로를 벗어나 온갖 생명들이 무시로 피고 지는 흙길과 산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만 년 동안 비와 눈을 견디고, 다시 만 년 동안 햇빛과 바람을 견딘 산길 위에 서면 마음이 무장 해제된다. 그저 편안하게 걸으면 머리는 맑아지고, 몸은 강건해진다.강진의 ‘다산 남도 유배길’은 마음을 치유하기에 좋다. 길이 품고 있는 사연들이 곡진하다. 자기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유배의 길로 혼자 내팽개쳐진 다산에 비할 바 못 된다. 그 길에서는 큰 상처가 작은 상처를 위로한다. 해남 ‘달마고도’는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다. 그 길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달마의 언급처럼 ‘휑하니 비어있어 비어있는 것조차 없는 순간’이 온다. 영암 ‘기찬묏길’은 수려한 월출산의 풍광을 보며 무작정 걷기 좋다. 놀며 걸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길 위에서 마음의 ‘힐링’이 핀다.동백처럼 겨울에 더 뜨거운 길, 다산 남도 유배길생각의 가지가 다산(茶山)에게로 향하는 길에서는 늘 경외의 마음이 핀다. 삶이 늘 고비였으나 생의 고삐를 한 번도 늦추지 않았던 사람. 쉬지 않고 기록해 결국 초라한 삶 위에 눈부신 갱신을 피워냈던 사람. 다산의 정신은 늘 자기 안에 있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언제나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오직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오랜 꿈을 이루는 것에 미약한 힘을 보탰다.그 다산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다산 남도 유배길은 60㎞가 조금 안 된다. 월출산 누릿재로부터 시작해 강진 사의재를 거쳐 백련사,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이다. 사의재(四宜濟)에서부터 길을 시작한다. 다산이 강진에서 처음 몸을 의탁했던 곳은 동문 밖 주막집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아무도 사학을 믿는 대역죄인과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오직 동문 밖 주막의 늙은 할머니가 다산에게 뒷방 한 칸을 내줬을 뿐이다. 다산은 비좁은 그 방에 사의재라는 당호를 붙이고 글을 썼으며 제자를 길렀다. 다산은 사의재에서 1805년 겨울까지 지냈다. 방 한 칸이 전부인 초라한 사의재에서는 치욕을 견딘 다산의 슬픔이 느껴진다.남도 유배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백련사 동백숲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2㎞ 산길이다. 동백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동백숲 옆으로 작지 않은 차밭도 만들어져 있다. 깊은 겨울에도 푸른 동백은 다친 마음들을 위로한다. 동백숲이 워낙 깊고 넓어 붉은 꽃잎이 맺히면 산이 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산은 그 길을 쉼 없이 오갔다. 다산보다 열 살 아래인 백련사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둘은 만덕산에서 나는 차를 마시며, 생각을 나눴다. 다산은 자정 무렵에도 횃불을 들고 혜장선사를 보러 길을 나서기도 했다. 다산(茶山)이란 호도 거기서 나왔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렸고, 다산은 호로 가져다 썼다.백련사와 다산초당 중간쯤엔 해월루가 있다. 다산은 거기서 자주 저 멀리 구강포 앞바다를 내려다봤다. 바다가 열리는 그곳, 거기서 배를 타면 멀리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약전을 만날 수 있다. 형제는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했고, 유배길에 남겨진 사랑이 현재에 닿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 달마고도길이 만만치 않다. 달마산은 가파른 바위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해발 489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산세가 거칠어 오르기 힘든 산이다. 미황사에서 시작해 큰바람재, 노시랑골, 몰고리재 등 달마산 주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17.74㎞의 달마고도 역시 다르지 않다. 원래 있던 길에 인공적인 것을 거의 가미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힘으로 길을 냈다. 자연과 순응하기 위해 중장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출가길(2.71㎞), 수행길(4.37㎞), 고행길(5.63㎞), 해탈길(5.03㎞), 모두 4개 코스로 이루어진다. 달마고도는 이름처럼 달마가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처럼 더디고 힘겹다. 그런데 정말 달마는 이곳에 왔을까? 고려 때 일이다. 중국 사신이 해남 땅끝에서 산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듣기로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저 산이 그 산인가?” 주민의 답변은 “그렇다”였다. 사신은 산을 향해 예를 행하고 그 산을 그림으로 그려갔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 정작 달마는 죽은 곳은 중국이다. 죽고 3년 뒤 되살아나 부처의 몸으로 인도로 되돌아갔다 한다. 다만 미황사의 옛 기록은 달마가 인도로 간 것이 아니라 해남 땅끝으로 왔다고 주장한다.몸은 좀 고되지만 달마고도에서 만나는 풍경은 아름다움의 끝이다. 하염없이 펼쳐지는 기암괴석은 액자처럼 아름답고, 저 멀리 보이는 땅끝마을 해안은 꿈인 듯 고즈넉하다. 걷다 보면 수없이 많은 너덜겅과 만나게 된다. 그 바위무더기에 앉아 햇볕을 받으면 해탈한 스님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달마고도가 품은 깊이의 절정은 깎아지른 바위 벼랑 사이에 차곡차곡 돌을 쌓아올려 다진 터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도솔암이다. 의상대사가 미황사를 세우기 전에 수행정진하기 위해 지었다. 정유재란 때 불 타 없어졌던 것을 2002년 법조스님이 오대산 월정사에서 내려와 지었다. 도솔암 작은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 낮달이 떴다.맥반석과 피톤치드로 기(氣)충전, 기찬묏길몸에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다. 영암 기찬묏길은 오직 걷기 위해 만들어졌고, 걷는다는 행위만으로 잃었던 기력을 ‘풀충전’할 수 있다. 걸으며 월출산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이니, 움추러들었던 허리가 반듯하게 펴진다. 그러므로 기찬묏길은 가장 사람친화적인 길이다.기찬묏길은 호젓한 산길이었다가 사람살이가 옹기종기 피어나는 오솔길이 한없이 뻗는다. 평지이거나 완만한 경사가 대부분이어서 걷기 쉽다. 길은 편하지만 풍경까지 만만한 것은 아니다. 월출산의 숲은 호젓한 평화를 주고, 바위와 물은 맑은 기운을 던져준다. 걸으면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인데, 과학적으로도 증명됐다. 월출산은 맥반석이 많고, 편백나무들은 피톤치드를 품어낸다. 피톤치드와 맥반석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신체의 상처와 염증을 치유한다.기찬묏길은 4개의 코스로 구성된다. 천황사야영장에서 기체육공원까지 약 4.5km는 생태(자연)의 길이다. 기체육공원에서 기찬랜드까지 2.0km는 힐링의 길이며, 기찬랜드에서 도갑사까지 6.5km는 배움의 길이다. 도갑사에서 왕인박사 유적지까지 2.0km인 왕인의 길, 총거리는 15㎞ 남짓이다.그 길 속엔 특별한 길이 하나 더 숨어 있다. 국민여가캠핑장에서 산성대 탐방로 입구까지 660m 구간으로 조성된 ‘황토맨발길’이다. 맨발 걷기의 효능은 특별하다. 부드러운 황토가 발에 기분 좋은 자극을 줘 소화 기능, 면역, 혈액순환, 뇌 건강 향상에 큰 도움을 준다. 고운 황토 입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맨발에 다져지고 다져져 반들반들 윤을 낸다.걸으며 문화의 숨결도 느낄 수 있다. 월출산 아래 자리잡은 기찬랜드는 천황봉에서 발원해 맥반석을 타고 내려온 계곡물을 수원으로 하는 천연 자연풀장, 여름엔 발 딛을 틈이 없다. 가야금산조기념관, 한국트로트가요센터, 조훈현 바둑기념관, 곤충박물관도 기찬랜드 안에 있어 볼거리·놀거리가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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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땅을 키운다! 강진 병영 한골목·해남 우수영 마을·영암 구림마을
시간을 오래 견딘 것들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강해영’엔 시간 속에서 피어나 기어코 꽃이 된 마을들이 있다. 그 마을들은 오랜 시간을 견뎠다. 발길 걷는 곳, 눈길 닿는 곳마다 가슴 저린 역사이고 문화다. 그 마을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강해영’이 건너온 시간의 강을 오롯이 건널 수 있다.강진 병영에는 조선육군총사령부였던 병영성과 함께 한골목이 있다. 길고 길어 십 리를 이어지는 골목엔 하멜이 쌓은 돌담이 아름답다. 해남 우수영 마을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왜선 330척과 판옥선 13척의 싸움을 우수영 마을은 아직 기억한다. 영암 구림마을은 2200년 동안 이어져온 유서 깊은 땅이다.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태어난 마을, ‘전설의 고향’보다 더 오래됐다.하도 길어서 십리 골목, 강진 병영 한골목강진 병영은 수인산, 성자산, 별락산, 화방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마을 전체가 역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병영’은 병마절도사영의 준말,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군사도시였다. 전라 병영성은 조선 500년 동안 전라도 육군의 총사령부였다.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광주 송정리)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이 옮겨왔다. 병영성은 초대 병마절도사인 마천목 장군 때 축조됐다. 장군이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했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불린다.병영성을 곁에 둔 마을에 십 리를 이어지는 길이 있다. 500년쯤 된 돌담길이다. 병영마을은 표류기를 쓴 하멜과 그 일행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한적한 골목을 거니는 길이다. 흙을 깔고 돌을 빗살무늬로 세우고, 또 흙을 깔고 다시 돌을 반대 방향으로 세우는 방식으로 만든 돌담이다. 우리나라에서 병영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돌담 양식이다. 돌담을 쌓는 방식은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했던 네덜란드인 하멜과 연관이 깊다.동인도회사 직원이었던 하멜은 1653년 가파도에 표류해 먼저 한양으로 압송됐다. 1656년부터 병영으로 옮겨 억류생활을 이어갔다. 1663년 여수를 거쳐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하멜은 무려 7년 동안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빗살무늬로 세운 하멜 방식의 돌담들은 400년이 조금 안 됐고, 우리 전통 방식으로 열 맞춰 세운 돌담들은 500년 정도 됐다. 하도 길어서 ‘한골목’이다. 한골목의 돌담은 2m를 훌쩍 넘을 만큼 높다. 돌담이 이처럼 높은 이유는 병영과 관련이 있다. 말을 타고 출입하는 군관들이 많았던 탓이다. 백성들은 말을 탄 군관들이 안을 볼 수 없도록 담을 높게 쌓았다.마을 가운데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마을 어느 쪽에서 보아도 보일 만큼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됐다. 800살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는 돌담이나 성벽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태어나 그간의 시간을 지켜봤다. 낯선 땅에서 억류돼 노역에 시달리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하멜 일행에게 그늘이 돼 주기도 했을 것이다. 나무 근처 고인돌은 병영에 자리 잡은 인간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됐음을 증언한다.거친 명량의 숨결, 해남 우수영 마을케이블카가 다니는 우수영관광단지는 세련된 모습이다. 지척의 우수영 마을은 느낌이 조금 다르다. 소슬하게 가라앉아 있는 해변마을 풍경인데, 벽화와 조각들이 담백한 멋을 낸다. 마을이 큰 규모를 갖춘 것은 세종 22년(1440년)이다. 해안 방어를 위해 전라우수영을 옮겨 와 당시로서는 거대한 규모의 군항(軍港)을 명량의 만 안쪽으로 세웠다. 양도(羊島)가 회오리치는 명량의 거센 물살을 막아주는 천혜의 입지다.해안 북쪽에 솟은 구릉 주변으로 돌을 둥그렇게 쌓아 성을 만들었다. 동서남북 4대 문을 짓고 성안에 관청과 객사를 두고, 북문 밖으로 망해루와 북장대를 세웠다. 동문 밖에는 명량대첩 비가 세워져 있다. 전라우수영은 군항 중 가장 규모가 큰 석축 성곽으로 둘레가 1,872m에 이르며, 높이 또한 4m로 비교적 높다. 성의 둥근 성벽에는 지금은 사라진 4대문과 각종 관청들이 무성한 소문처럼 그려져 있다.2015년부터 우수영 마을은 오랜 전통과 현재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문화마을로 거듭났다. ‘우수영 문화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된 것인데, 미술인들과 함께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쇠락한 마을을 재생시켰다. 우수영 사람들의 삶을 담은 벽화, 조각, 설치 작품들은 정겹다. 법정스님의 생가터에 조성된 ‘인문학 하우스’에 들어서면 생각이 맑아진다.동문 밖 명량대첩비와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의 생애처럼 빛난다. 이순신이 명량에서 돌파한 것은 스스로의 안위나 따르던 병사들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그 바다에서 숨이 멎기 직전의 조선이 기적처럼 살아났다. 명량의 물살은 바뀔 때마다 삶과 죽음의 전복을 일으킨다. 그 물살의 변화가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채택한 유일한 전법이었다. 명량의 물살 위에 외로운 일자진으로 버텨 끝내 이겼던 군사들의 사투를 명량대첩비는 기록하고 있다.2200년의 시간을 품다! 영암 구림마을영암 구림마을, 까마득한 시간 동안 마을이 거기 있었다. 삼한시대부터였으니, 무려 2200년이다. 마을이 영암이란 지명보다 더 오래됐다. 영암이 영암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경덕왕 16년이다. 서기 757년으로 1300년이 안 됐다. 2200년 동안 느린 걸음으로 지금에 이르렀으니 마을은 존재 자체로 시간의 지층이다.구림에서는 지금은 역사 자체가 된 인물도 많이 나왔다. 일본에 학문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 왕인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도선국사도 구림마을 사람이다. 지명도 도선으로부터 유래했다. 도선의 어머니는 물길에 떠내려온 참외를 먹고,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다. 그 아이를 내다버렸는데, 비둘기가 감싸 길렀다. 비둘기 구(鳩)에 숲 림(林), 그래서 구림이다.구림마을은 한국 도기가 탄생한 곳, ‘도기박물관’에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체험하며 한국 도기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도 품고 있다. 하정웅 부모의 고향이 영암인 인연으로 그는 미술품 3400여 점을 기증했고, 그것들을 모태로 구림마을에 미술관이 지어졌다.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전통도 살아 숨 쉰다. 1565년 조선 명종 때 시작된 구림대동계다. 구림마을 한복판에 굵은 노송에 둘러싸인 건물, 회사정이 있다. 지금껏 유지되는 구림대동계의 집회 장소다. 대동계의 규율은 엄격했다. 불효한 자, 연장자를 능욕한 자, 패악무도한 자, 풍기문란한 자에게 모진 매를 때렸다.왕인박사유적지는 세월이 기품이 느껴진다. 그가 태어난 성기동 집터, 그가 공부했던 옛 서당 ‘문산재’와 ‘양사재’ 등이 있다. 왕인은 일본에 문화를 심었다. 일본 조정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함께 건너 간 기술자들을 통해 아스카문화를 꽃 피울 기술도 전했다. 구림마을의 힘이 일본을 키운 것이다. 구림마을에 가면 알게 된다. 땅이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다시 땅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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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식도락여행 1번지, 전라도 ‘손맛’ 영암 독천식당·강진 설성식당·해남 본동기사식당
음식은 손맛이라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맛’일 것이다. 삶에 지칠 때 어머니 손맛이 그리운 것은 어머니에게서 음식을 받아 먹어온 시간이 뇌리에 오래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음식이 간직해 온 시간, 그러니까 음식에 담긴 여러 사연들이 맛을 배가 시킨다. 음식 안에는 바다가 육지가 되고 까까머리 꼬마가 백발노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담긴다. 음식은 삶이다.영암 독천식당의 갈낙탕은 땅이 걸어온 시간을 담고 있는 음식이다. 지금은 영산강 하구둑으로 바다가 막혔지만 한때 독천엔 질 좋은 ‘뻘밭’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세발낙지는 맛이 야들야들해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다. 강진 설성식당은 전라병영성을 찾은 외지인들에게 전라도의 깊은 맛을 선사하던 곳이다. 연탄에 구운 돼지불고기가 메인인 서민 한정식이다. 해남 본동기사식당은 제 때 식사하기 어려운 운전기사들의 허기진 속을 달래주던 곳이다. 15가지 찬이 따라 나오는 갈치조림백반은 주머니 사정 가벼운 운전기사들에게 가성비 좋은 천국을 선사했다.소갈비와 낙지의 이유 있는 만남, 독천식당 갈낙탕영암 학산면 독천, 갈낙탕을 하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낙지 음식 거리’다. 쇠락한 시골에 식당들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 그 식당들은 존재 자체로 독천이 갯마을이었던 저 옛날을 회고한다. 하구둑이 막아지기 전 독천은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하구 갯벌이었다. 거기서 잡아올린 뻘낙지는 천하명물이었다. 지금이야 무안낙지가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영암 독천낙지에 명암도 못 내밀었다.어디 그뿐인가. 오일장에는 우시장이 열렸다. 독천이란 마을 이름도 우시장과 영산강에서 유래했다. 송아지 독(犢)에 하천 천(川)이다. 질 좋은 낙지가 푸지고 소고기가 넘치니 둘이 만나 갈낙탕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갯벌이 파괴되고, 우시장은 무너졌지만 시간의 유산처럼 갈낙탕이 남아 지역경제를 일으켜 세운다.주문한 갈낙탕이 나왔다. 커다란 갈빗대에 반질반질한 낙지 머리가 그릇 위를 떠다닌다. 갈비탕의 녹진한 맛에 낙지가 더해져 국물이 시원하다. 오래 고운 갈비와 적당히 익은 낙지가 보드랍게 씹힌다. 이건 뭐, 두말 할 것도 없이 몸이 건강해지는 맛이다. 갈낙탕의 태생부터가 그렇다. 삼복더위에 지친 독천의 소가 뻘에서 기어 올라온 낙지를 잡아먹고 벌떡 일어나 기운을 차리는 걸 보고 만든 음식이라 한다.믿거나 말거나인 탄생 ‘썰’이 하나 더 있다. 어느 노파가 갈비탕을 끓이는데, 옆에 둔 산낙지가 제 발로 냄비로 기어 들어갔더란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국물 맛이 너무 개운해 갈낙탕이 탄생했다는 비화다. 사람들 입맛 까다로운 요즘, 갈낙탕 하나로 승부를 보진 않는다. 낙지 연포탕, 낙지 초무침, 낙지 탕탕이, 불고기 낙지전골도 인기다.빈 방에 밥상째 들어오는 서민한정식, 강진 설성식당 불고기백반주문이랄 게 없다. 식당에 들어서면 “뭐 드실래요?”가 아니라 “몇 명이세요?”란 질문이 날아온다. 메뉴는 오직 하나 연탄 불고기백반이다. 지정해 준 방으로 들어가면 일단 당황한다. 아무것도 없다. 5분쯤 지나면 의문이 풀린다. 종업원 두 명이 잘 차려진 음식을 밥상째 들고 들어온다. 50년 넘게 고수한 영업 방식이다.메인인 연탄 불고기에 삭힌 홍어, 조기구이, 토하젓, 갈치속젓, 두부, 계란말이, 더덕무침, 각종 나물 등 20여 가지 반찬이 상을 가득 채웠다. 반찬 놓을 자리가 모자라 일부는 2층으로 쌓았고, 젓가락 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음식이 빽빽하다. 1인 1만3000원에 받는 전라도 한정식 밥상이 따로 없다.주인공은 역시 돼지 불고기다. 연탄불에 재빠르게 구워 타지 않고, 불향을 고기에 은은하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비법이다. 아주 적당한 매운맛에 불향이 조화롭게 스며들어 젓가락 쉴 새가 없다. 토하젓도 별미다. 강진 토하는 예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조선 시대 궁중 진상품으로 한양에 갔던 음식이다.설성식당이 자리한 병영은 조선 500년 ‘육군총사령부’ 병영성(兵營城)이 있던 고장이다. 병영성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조선 서남부 지역 최대 상업 지역이었다. 해상 무역과 상업이 번성하면서 유동 인구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먹을거리들이 발달했다. 그것을 모아모아 한상에 저렴하게 담아낸 것이 설성식당 불고기백반이다.돈 1만2000원에 15첩 만찬, 본동기사식당 갈치조림백반물가가 하염없다. 월급은 제자리걸음인데, 물가는 하늘을 뚫을 기세다. 자고 나면 오르고 또 오르니, 김치찌개가 만 원을 넘어선 고물가 시름의 시대다. 기본 갈치조림에 그 귀하다는 전복장까지 등장하는데 가격이 1만2000원이다. 그마저도 얼마 전까지 1만 원을 고수하다가 하염없는 물가 급등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인상한 금액이다.상이 차려지면 이 가격에 이런 밥상이 가능하다고, 의문이 든다. 해남에서 생산한 갯것들이 상 위를 가득 채운다. 갈치조림에 전복장, 꼬막무침과 전어무침까지 출동한다. 맛과 양, 가격의 삼위일체가 완벽한 조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는 게 퍽퍽한 기사님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다 보니 무턱대고 가격을 올릴 수 없었다. 지금은 꽤 이름나 기사 손님들보다 땅끝마을을 찾은 외지인들이 더 많지만 저렴한 가격을 식당 전통처럼 유지하고 있다.메인 요리인 갈치조림은 죽은 입맛을 살린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글자글 끓여주던 딱 그 맛이다. 매콤하고 짭조름하면서 뒷맛이 시원하다. 갈치 살은 촉촉하고,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무가 옹숭깊은 시원한 맛을 낸다.허기진 배를 듬직하게 채웠으니 식당 문을 나서면 눈이 호강할 차례다. 북위 34도 17분 38초, 한반도 땅덩어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땅끝마을이 지척이다. 횃불 모양 땅끝전망대에 서면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진도가 코앞이고, 저 멀리 흑일도와 노화도, 보길도가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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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영, 신나는 축제 속으로 ‘풍덩’ 강진 청자축제· 해남 미남축제·영암 왕인문화축제
맛있다. 멋있다. 신난다. 재미난다. 그리하여 마음보다 먼저 발이 축제가 열리는 ‘강·해·영’에 도착한다. 저마다 색깔이 분명하다. 강진 청자축제에서는 천년을 이어온 청자의 매혹적인 비색에 취한다. 해남 미남축제는 한반도의 땅끝, 해남이 길러낸 온갖 산해진미로 혀가 즐겁다. 영암 왕인문화축제는 백리 벚꽃길에 몸이 먼저 잠기고, 구림마을이 지나온 시간의 숨결에 마음이 흠뻑 빠져든다.세 지역의 축제는 주제에 따라 모양이 각기 다르지만 확실한 공통점이 있다. 가면 즐겁다는 것이다. 어느 축제를 가나 오감 폭발하는 재미 속에 ‘풍덩’ 빠져든다. 강·해·영의 액기스를 응축해 담아놓은 지역축제, 그 매력의 블랙홀에 한 번 빠지면 영영 벗어날 수 없다. 궤도를 이탈한 별처럼 즐거움의 늪으로 무한 직진이다.천년의 색에 물들다!, 강진 청자축제강진은 물 맑고 흙이 좋아 도자기 주산지로 명성이 드높았다. 탐진강 따라 뱃길도 뻗어 한양에 닿기 편했다. 고려 때부터 14세기까지 무려 500년 동안 청자문화를 꽃피운 강진, 그 찬란한 청자의 역사는 현재도 유효하다. 지금껏 국내에서 발견된 400여 기의 옛 가마터 중 200여 기가 강진에 있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급 청자유물 중 80%가 강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강진 청자축제는 찬란했던 역사를 현재로 끌어와 청자와 놀며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배우는 놀이터다. 축제의 주인공은 역시 청자다. 고풍스런 멋을 지난 전통 청자부터 현대적 감각으로 다양하게 재해석된 청자들이 상설 전시돼 눈이 호강한다.눈으로만 보고 끝이면 섭섭하다. 청자축제의 단연 인기상품은 도자기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청자 체험프로그램이다. 방문자들이 청자를 직접 만들어보며 청자의 세계로 흠뻑 빠져든다. 점토를 빚어 청자의 형태를 잡고 유약을 바른다. 전통가마에서 직접 구워 도자기의 색과 형태가 변화하는 과정을 몸으로 체득하며 청자의 정교함과 예술성을 알게 된다.축제에서 먹을 게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강진 대표 특산물인 연잎, 바지락, 파프리카, 쌀, 김 등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 청자모양을 본 뜬 독특한 디저트와 간식들은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청자에 예쁘게 세팅된 음식과 음료는 너무 예뻐 먹기에 아까울 정도다.잠든 혀를 깨운다!, 해남 미남축제해남은 광활한 농경지와 청정바다를 품고 있는 곳이다. 해남 어디를 가나 배추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바다로 나가면 양식김이 넓게 깔렸다. 붉은 황토가 키워낸 고구마는 보는 순간 입맛부터 다시게 한다. 재료가 풍성하니 해남 맛을 찾아온 식도락 여행객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빈번하다.해남에서 뭘 먹지? 이 질문을 단번에 해결하는 답이 바로 미남축제다. 해남 맛의 시작은 해남 8미다. 떡갈비, 삼치회, 황칠오리백숙, 닭 코스요리, 보리쌈밥, 한정식, 생고기, 산채정식까지 해남은 푸짐한 맛의 대명사다. 해남 8미를 포함해 대흥사 사찰음식, 조상들의 지혜로 발효된 각종 장, 고구마, 쌀, 김요리 등을 총망라해 해남 맛의 끝을 보여주는 게 미남축제다. 얼굴이 잘 생겨서 미남이 아니고 맛있는 남쪽, 미남(味南)이다.축제가 열리는 기간은 10월의 끝이거나 11월 시작이다. 이제 갓 수확한 농산물이 넘쳐나는 때다. 원래 맛있는 해남 음식을 제철에 즐기니 맛은 배가 되고, 건강에도 그만이다. 우리 민족은 모두가 맛에 진심이다. 축제장을 옮겨 다니며 해남의 맛을 입에 넣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고, 곧바로 천당 직행이다.놀거리도 풍성하다. 축제가 열리는 곳은 두륜산 도립공원이다. 대흥사에서 가을 단풍을 만끽하고 가족과 함께 케이블카에 오르면 근심은 남의 것, 즐거움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된다.시공초월, 왕인의 숨결을 느끼다!, 왕인문화축제왕인문화축제는 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다. 길 옆으로 100리를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을 보노라면 시작부터 마음이 설렌다. 그 길의 아름다움은 건설교통부가 별도 인증했을 정도다. 월출산의 기암괴석과 청보리가 벚꽃과 몸을 섞는 영암 100리 벚꽃길을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했다. 벗꽃길이 왕인문화축제의 간판이다.축제의 메인인 왕인박사유적지는 일본 아스카(飛鳥)문화의 원조가 됐던 왕인박사의 자취를 시공을 초월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유적 입구 천인천자문 조형물은 서체가 다양하다.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파한 왕인박사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중·일 명사 1000명이 쓴 글씨를 석공이 돌에 새겼다. 왕인의 일대기를 다룬 부조 석상과 기록화도 만날 수 있다. 왕인박사 생가를 거쳐 망월정에 오르면 영암 월출산 능선과 구림마을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왕인이 8세 때 입문해 공부했던 문산재, 동료들과 담소를 나눴던 양사재, 서재로 이용했던 책굴도 오랜 기품을 품고 있다. 인근을 흐르는 계곡물은 성천이다. 문산재 아래 터와 왕인탄생지 바로 옆쪽에서 성천수를 마실 수 있다. 이 물을 마시고 목욕하면 성인(聖人)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왕인문화축제는 수많은 행사들로 왕인의 삶을 기억한다. 왕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모습을 재현할 때면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에 빠져든다. 왕인문화축제에 가면 볼 것도 먹을 것도 많다. 천상의 바위예술관이라 불리는 ‘월출산’과 천연 자연 풀장인 ‘기찬랜드’가 여행객을 반긴다. 영암 매력한우와 개펄에서 잡은 낙지를 탕으로 끓여낸 영암의 갈낙탕은 전라도 최고의 별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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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으면서 다른 세 개의 찻잎 풍경, 영암 덕진차밭·강진 월출다원·해남 설아다원
차밭이라고 다 같은 차밭이 아니다. 개별로 보면 같은 차나무이지만 모여 차밭을 이루면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하루해면 둘러볼 수 있는 영암의 덕진차밭, 강진 설록다원과 해남 설아다원은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한 번 나선 차밭 투어에서 만나는 세 가지 풍경에 마음이 부자가 된다.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하루쯤 푸른 고즈넉함 속에 묻히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 하염없이 펼쳐진 차밭은 근심을 날려준다. 마음이 편안하다. 그 차밭 근처에 누워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시간이 10년쯤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해도 크게 아쉬울 거 같지 않은 그런 편안함이다.덕진차밭은 차밭 자체보다 저 멀리 월출산이 액자처럼 아름답다. 월출다원은 드넓은 녹차의 푸르름에 반하고, 월남사지3층석탑에 기대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설아다원은 조금 별종이다. 유기농 차밭은 덤이고, 온갖 체험과 주인장의 판소리 가락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월출산을 배경으로 끌어다놓은 덕진차밭덕진차밭은 영암에서는 가장 크지만 다른 지역의 이름난 차밭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차밭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5만여 평 규모다. 백룡산 자락을 등 뒤에 두고 차나무들이 정겹게 붙어 앉아 있다.덕진차밭이 규모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것은 월출산 덕이다. 그 차밭 데크에 앉아 영암읍을 내려다보면 아름다운 ‘선경’이 펼쳐진다. 진경산수화 한 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월출산의 기암괴석들이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다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끌어다 놓았으니 덕진차밭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계절 구분 없이 차밭과 어우러진 월출산 풍경을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날랜 걸음을 준다. 덕진차밭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이른 아침과 해질 무렵이다. 아침에는 차밭과 월출산이 안개를 품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품어낸다. 해질녘은 역광이 산란한다. 월출산 뒤로 지는 해가 하루 마지막 빛을 품어내면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 현실 안에서 연출된다.덕진차밭은 한국제다가 운영하는 차밭이다. 품질 놓은 녹차가 생산된다. 덕진차밭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주변에 야생차밭이 존재했다. 한국제다가 그곳에 차밭을 일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백룡산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사시사철 차나무를 감싼다. 특히 낮 동안 따사로운 햇살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남향이다. 90%가 재래종 차나무로 마시면 속 깊이 퍼지는 우아한 맛을 낸다. 아름다운 월출산을 마시는 느낌이다.월남사지3층석탑에 기대 선 월출다원월출다원은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아름다운 숲이다. 키 작은 차나무들이 이룬 숲은 넓고 또한 의미가 깊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인 장원 서성환 회장이 설록차의 대중화를 위해 1982년에 조성했다. 10만평이 넘는 부지에 심어진 차나무들은 사철 푸르름을 발산한다. 저 옛날, 차문화의 중심은 언제나 절이었다. 지금은 복원공사가 한창이지만 터만 남아있던 월남사지 주변은 원래부터 재래종 치나무가 지천이었다.월출다원의 차나무를 키우는 것은 8할이 월출산이다. 산은 자주 안개를 끌어와 차나무를 덮는다. 습한 안개를 자주 만나는 차나무들은 떫은맛을 덜어내고 깊고 담백한 향을 키운다. 아침마다 찻잎을 타고 흐르는 이슬은 월출산이 내린 안개의 다른 모습이다. 그 차 한 잔에 결국 월출산이 담겨 있는 것이다.월출다원이 더 아름다운 것은 월남사지를 품고 있어서다. 월남사지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추정의 역사다.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고려 후기 진각국사가 창건했다는 것, 한때는 지금의 월남마을 전체가 절의 영역이었다는 언급 정도가 고증된 사실이다. 다만 선명한 것은 월남사지삼층석탑뿐이다.탑은 경이롭다. 다른 모든 것은 ‘시간의 재’로 남았는데 오직 삼층의 석탑만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진각국사비도 위의 절반은 몸체에서 떨어져 나갔고, 남아있는 앞면 또한 글자 한 자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을 지워버린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을 탑은 어떻게 건너왔을까? 월남사지삼층석탑은 담백하다. 단조로운 선들이 모여 탑을 이룬다. 보는 각도에 따라 탑의 위용이 변하는데 월출산과 겹쳐 보면 바위 한쪽이 되고, 그 반대편이라면 푸른 차나무들과 하나로 섞인다. 탑을 이룬 석재의 선에서 긴 여백이 느껴지는 탑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여성과 남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인데 늘씬하면서 우아하고, 또한 강렬하다. 전형적인 백제의 석탑 양식이다.차밭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설아다원두륜산 남쪽 자락에 만들어진 1만여 평의 설아다원에 서면 차향기보다 사람냄새가 더 깊다. 원래는 헐벗은 산비탈이었다. 오근선·마승미 부부가 20년이 넘는 시간을 하루 같이 차밭을 일궜다. 그 고된 노동의 시간이 쌓여 지금의 설아다원 풍경이 완성됐다.차나무만 심은 게 아니다. 울타리에는 목련나무나 다래덩굴 같은 나무를 심어 보는 눈들을 풍성하게 했다. 차밭 사이사이 단풍나무, 때죽나무, 녹나무, 후박나무 등을 식재해 계절감을 살렸다. 그네를 매달고, 썰매장을 만들어 아이들 놀거리도 함께 제공한다.설아다원은 눈으로만 보는 차밭이 아니다. 쉼과 체험을 통해 오감으로 느끼는 차밭이다. 설아다원은 어린 찻잎을 한 잎 한 잎 손으로 따고 선별해 솥에 덖고 비비고 말려 차를 만든다. 그 과정에 동참해 직접 만든 차를 우려 맛을 음미한다. 감나무잎차, 녹나무잎차, 쑥차, 목련차도 맛볼 수 있다. 숲 해설사인 주인 내외와 함께 차밭을 거닐며 식물들의 삶도 전해 듣는다. 흙으로 만든 펜션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도시에서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진다. 차밭 아침산책은 고즈넉함의 끝을 맛볼 수 있다.무엇보다 남도의 ‘흥’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마승미 씨의 남도민요와 판소리 공연은 일품인데, 흥이 동하면 밤새 가락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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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움 속에서 피어난 꽃, 다산 영암 누릿재·강진 다산초당·해남 녹우당
다산(茶山)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늘 서러움이 핀다. 다산에게 유배는 치 떨리는 분노와 어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18년의 시간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그가 세상에 남긴 542권의 저서 거의 전부가 유배지에서 작성됐다. 다산은 서러움 속에서 기어이 꽃을 피어낸 사람이다.다산이 처절한 유배의 길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살아남은 자의 아픈 소회는 다산이 세상에 남겨놓은 글을 통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억울했지만 다산은 제 입으로 억울함을 옮겨 놓지 않았다.다만 입술을 깨물고 내면을 닦았다. ‘천하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오직 나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지 못 가는 곳이 없다.’ 다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이 내민 칼을 자기의 안으로 돌려 다시 세상을 아름답게 품었다.눈물로 넘은 길, 누릿재누릿재는 저 옛날 영암에서 강진을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길이 험했다. 산적들이 진을 쳐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 길이 세상에서 버려진 것은 일제 때다. 일제는 해발 230미터인 누릿재를 버리고, 인근 풀치재에 새로운 신작로를 뚫었다. 풀치재의 해발고도가 누릿재보다 50미터 낮아 길을 내기가 편했다.오래 버려져 있던 누릿재가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009년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다산 유배길을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사업지로 선정했다. ‘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김영랑생가-무위사-월출다원-천황사-월출산-도갑사-왕인박사 유적지-구림마을’로 이어지는 55km 길이다.다산의 아픔을 넘어 지금 누릿재는 편안하다. 사자저수지를 넘어 시작되는 누릿재는 잘 단장돼 여유를 느끼는 산행의 즐거움을 준다. 다산은 누릿재를 넘어 강진 땅 성전에 닿았다. 그는 누릿재를 넘으며 ‘탐진촌요’(耽津村謠) 시편들을 남겼다. 문장 속에 그리움이 흐른다.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탐진촌요에는 누릿재를 넘는 걸음마다 눈물이었던 다산의 심사가 고스란하다. 월남리로부터 시작하는 누릿재는 월출산 아름다운 풍경을 곁에 두고 길이 흐른다. 그에게는 밟히는 걸음이 모두 치욕이었을 것이고, 풍경들이 모두 젖은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흑산도로 향하는 형 정약전과 나주에서 헤어지고 눈물로 넘었던 산길 위에서 다산은 초라했다. 누릿재를 걸으면 다산의 저린 슬픔이 느껴진다.다산 삶의 절정, 다산초당1808년 봄, 다산초당의 시대가 열린다.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다산초당에서 보낸 시간은 다산 일생에 가장 빛나는 10년이었다. 그는 초당의 동쪽에 동암을 지어 거처했다. 건너엔 서암을 지어 제자들을 머물러 했다. 물을 끌어다 인공의 폭포를 만들었고 연못도 팠다. 연못 가운데는 해변에서 주어진 돌로 탑을 세웠다. 흑산도에 있는 형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잉어와 붕어를 길렀고, 화초를 심었다. 산 중턱에 밭을 일궈 채소도 길렀다.바위 절벽에는 징표를 새겼다. 정석(丁石),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면에 쌓았던 다산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았다. 바위에 새겨진 달랑 두 자가 다산의 깊이를 말해준다. 다산초당은 지금 다산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공간이다.사상범의 둘레에 눌려 유배된 몸으로 다산은 백성을 걱정했다. 그의 저서들은 모두 고뇌의 문장이며 삼정(전정·환곡·군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목민심서는 다산 저서의 정점이며 전부가 다산초당에서 작성됐다. 그는 당시의 국가를 이렇게 진단했다. “털끝만큼 작은 것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 이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 했다.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목민심서에는, 다산초당에는 200년의 시차를 두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500년을 이어온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남도를 대표하는 종가의 품격이 묻어난다. 해남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4대조 윤효정이 지었다. 고산은 82세 되던 1669년 수원의 집을 이곳으로 옮겨 와 본래 있던 종가에 덧대어 지었다. 녹우당은 종가의 기품처럼 고적하다. 덕음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아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녹우당 초입에는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이 있다. 해남 윤씨 가문을 대표하는 윤선도와 윤두서의 생애와 여러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존재 자체로 미덕을 품고 있다. 녹우당의 주변 경관을 헤치지 않도록 지하에 만들었다.특히 녹우당은 건물과 함께 나무들이 아름답다. 오래된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고택의 기품을 더한다. 본채와 사당 사이 담장을 걸어 녹우당 뒤편으로 가면 500년 전에 조성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비자나무숲이 나온다.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뻗어있는 비자나무숲은 아름답고, 숲과 계곡은 녹우당과 어우러져 오래된 것들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무엇보다 녹우당은 다산의 외가이다. 다산초당도 원래 해남 윤씨가 사용하던 것을 녹우당의 후원을 받아 다산이 고쳐 썼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 그러니까 공재의 손녀이다.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다산은 녹우당에서 여덟 수레의 장서를 빌려 읽었다. 다산의 학문적 성과는 녹우당의 조용한 기여 속에서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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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와 함께 시간의 강을 건너가 볼까요? 영암 도기박물관·해남 녹청자·강진 청자박물관
그릇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예요. 밥과 국은 어디에 떠서 먹고, 반찬은 또 어디에 담을까요? 인간의 역사는 도구의 역사입니다.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냈죠. 그릇의 시간은 토기로부터 시작됩니다.중학교 역사시간에 밑줄 그어가며 외웠던 신석기 빗살무늬토기 기억하시죠? 바닥이 뾰족합니다. 해변이나 강가에 주로 살았던 당시 사람들이 모래나 흙에 박아서 사용했죠. 토기는 통일신라시대 도기를 거쳐 고려청자로 발전합니다. 조선에서는 백자가 유행이었습니다.‘강해영’은 이 나라 도자기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어요. 통일신라시대 도기의 중심지는 영암이었고요. 더 강조할 것도 없이 강진은 고려 최대의 청자 생산지였습니다. 이름이 다소 생소하실 테지만 도기와 청자 사이, 녹청자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해남이 녹청자의 주산지였습니다. ‘강해영’이 품고 있는 도자기의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볼까요!도자문화의 원류를 만난다!, 영암 도기박물관신석기 빗살무늬토기나 청동기 민무늬토기는 겉면이 거칩니다. 반면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백자는 겉면이 반질반질하고 엷은 유리막 같은 코팅이 되어있지요. 과연 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답은 바로 유약입니다. 정성으로 빚은 토기 겉면에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구워내면 도기가 됩니다.유약은 1200년 전 당시로서는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이었습니다. 유약 발라 구워낸 도기를 최초 대량 생산한 곳을 어디였을까요? 바로 영암 군서면의 구림도기 가마입니다. 그러니까 영암이 고온 유약 도기의 원조인 셈입니다. 1987년 가마터에서 입넓은납작병, 대형항아리, 주름무늬병 등 그릇 도기와 기와나 토관 같은 생활 도기들이 대거 발굴됐어요.그 도기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영암 도기박물관입니다. 1200년을 이어온 도기의 숨결을 체험과 전시를 통해 촉각, 청각, 공감각적으로 경험해요. 흙과 도기를 주제로 한 전시도 매일 열려 한국도기의 깊이와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박물관에 들어서면 ‘김대환 전시실1·2’부터 만날 수 있는데요. 김대환 선생이 기증한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대에 이르는 도기유물 375점을 전시하고 있어요. 전통도기의 모양과 쓰임, 의미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요. 2층의 ‘현대도자실’에서는 전통도예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3층 ‘동강 하정웅 컬렉션 기념실’은 영암군 명예홍보대사이기도 한 하정웅 전생이 영암에 기증한 기술품 중 도자기들만을 모아 기획 전시하고 있습니다.‘녹청자’를 아시나요?, 해남 녹청자1983년 완도 약산면 조약도 동쪽 끝 바다에서 놀라운 것이 발견됐어요. 무려 1000년 동안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완도선이 깨어났지요. 키조개를 캐던 잠수부가 청자 4점을 발견하면서 완도선의 전설은 시작됐습니다. 완도선은 최초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완도선에서는 청자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석 달 동안 3만645점의 청자를 인양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자들의 색깔이 우리가 흔히 알던 고려청자와 조금 달랐어요. 신비로운 녹색빛을 띄고 있었죠.그럼 그 녹청자들이 생산된 곳은 어디일까요? 해남 산이면 진산·초송리 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가마터가 녹청자들의 고향이었습니다. 고려 도자사의 새로운 전환기로 일컬어지는 11세기에 제작된 것인데요. 비색(翡色)의 청자는 고급스럽고 귀족적이며, 조금 차가운 느낌을 줍니다. 반면 녹갈색이나 암갈색, 황갈색을 띤 녹청자는 매우 서민적이며, 투박하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고려 상감청자가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면 녹청자는 지방관청이나 사찰, 재산을 제법 모은 서민들이 사용하던 것이에요.완도선의 발견으로 11세기 녹청자의 모습과 특징, 수요와 공급 과정, 용도와 수용층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그래서 완도선 녹청자는 우리나라 도자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유물로 평가됩니다.난파선에 가득 담긴 녹청자, 어딘가 무척 신비롭지 않나요? 해남 산이면 ‘진산리 녹청자 가마터’를 만나러 갑니다. 11세기 고려시대, 수없이 많은 녹청자를 배에 싣고 내렸던 포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바다였던 땅이 간척되면서 지평선이 보일 듯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요. 겨울 밭에서는 배추 수확이 한창입니다. 배추밭 사이, 웃자란 억새 속에서 진산리 녹청자 가마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눈을 감으면 천 년 전 녹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의 섬세한 손길이 보이는 듯해요. 천 년의 신비로움은 그렇게 해남 들녘에 오래 잠들어 있습니다.같은 색의 청자는 없다!, 강진 청자박물관강진 청자박물관에서는 매일 오묘한 빛의 향연이 펼쳐져요. 진품 고려청자 수만 점이 전시돼 있는데, 모두 다른 빛을 냅니다. 청자는 불의 온도, 흙 성분, 가마 속 산화와 환원 상태, 제작 기술에 따라 빛깔이 모두 다릅니다. 청자의 기본 빛깔은 비취색인데요, 박물관에서 만나는 청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색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천 년을 품어온 청자의 오묘한 색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만 개의 청자는 만 개의 색을 냅니다. 담황색, 녹갈색, 녹황색, 녹회색, 청회색, 회녹색, 담청색 등 색이 다채롭지요. 강진청자박물관에서는 그 청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상현실, 증강현실, 프로젝션 매핑 등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체험할 수 있어요. 체험은 어드벤처 영화를 보듯 몰입감이 매우 뛰어나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지요.강진 청자박물관의 최고 장점은 청자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는 거예요. 100평 규모의 체험장에서는 80명이 동시에 체험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전동물레를 돌려 청자를 빚고요, 문양도 직접 새깁니다. 조각체험은 일정한 형태로 이미 성형돼 반 건조된 청자작품에 조각도를 이용해 글씨나 그림 등을 새겨 넣는 작업입니다. 물컵, 반상기, 꽃병, 매병, 주병, 항아리, 머그컵, 필통 등을 직접 조각할 수 있어요.코일링체험은 점토 1kg으로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직접 만들 수 있고요, 모자이크체험은 종이로 제작된 소형 매병과 주병형태의 합판에 청자파편을 직접 붙여 제작합니다. 체험 작품은 초벌구이와 본벌구이를 거쳐 체험자에게 택배로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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