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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움 속에서 피어난 꽃, 다산 영암 누릿재·강진 다산초당·해남 녹우당
다산(茶山)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늘 서러움이 핀다. 다산에게 유배는 치 떨리는 분노와 어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18년의 시간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그가 세상에 남긴 542권의 저서 거의 전부가 유배지에서 작성됐다. 다산은 서러움 속에서 기어이 꽃을 피어낸 사람이다.다산이 처절한 유배의 길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살아남은 자의 아픈 소회는 다산이 세상에 남겨놓은 글을 통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억울했지만 다산은 제 입으로 억울함을 옮겨 놓지 않았다.다만 입술을 깨물고 내면을 닦았다. ‘천하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오직 나라는 것만은 잘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다가도,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지 못 가는 곳이 없다.’ 다산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이 내민 칼을 자기의 안으로 돌려 다시 세상을 아름답게 품었다.눈물로 넘은 길, 누릿재누릿재는 저 옛날 영암에서 강진을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길이 험했다. 산적들이 진을 쳐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 길이 세상에서 버려진 것은 일제 때다. 일제는 해발 230미터인 누릿재를 버리고, 인근 풀치재에 새로운 신작로를 뚫었다. 풀치재의 해발고도가 누릿재보다 50미터 낮아 길을 내기가 편했다.오래 버려져 있던 누릿재가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009년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다산 유배길을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사업지로 선정했다. ‘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김영랑생가-무위사-월출다원-천황사-월출산-도갑사-왕인박사 유적지-구림마을’로 이어지는 55km 길이다.다산의 아픔을 넘어 지금 누릿재는 편안하다. 사자저수지를 넘어 시작되는 누릿재는 잘 단장돼 여유를 느끼는 산행의 즐거움을 준다. 다산은 누릿재를 넘어 강진 땅 성전에 닿았다. 그는 누릿재를 넘으며 ‘탐진촌요’(耽津村謠) 시편들을 남겼다. 문장 속에 그리움이 흐른다.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탐진촌요에는 누릿재를 넘는 걸음마다 눈물이었던 다산의 심사가 고스란하다. 월남리로부터 시작하는 누릿재는 월출산 아름다운 풍경을 곁에 두고 길이 흐른다. 그에게는 밟히는 걸음이 모두 치욕이었을 것이고, 풍경들이 모두 젖은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흑산도로 향하는 형 정약전과 나주에서 헤어지고 눈물로 넘었던 산길 위에서 다산은 초라했다. 누릿재를 걸으면 다산의 저린 슬픔이 느껴진다.다산 삶의 절정, 다산초당1808년 봄, 다산초당의 시대가 열린다. 유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다산초당에서 보낸 시간은 다산 일생에 가장 빛나는 10년이었다. 그는 초당의 동쪽에 동암을 지어 거처했다. 건너엔 서암을 지어 제자들을 머물러 했다. 물을 끌어다 인공의 폭포를 만들었고 연못도 팠다. 연못 가운데는 해변에서 주어진 돌로 탑을 세웠다. 흑산도에 있는 형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잉어와 붕어를 길렀고, 화초를 심었다. 산 중턱에 밭을 일궈 채소도 길렀다.바위 절벽에는 징표를 새겼다. 정석(丁石),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면에 쌓았던 다산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았다. 바위에 새겨진 달랑 두 자가 다산의 깊이를 말해준다. 다산초당은 지금 다산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공간이다.사상범의 둘레에 눌려 유배된 몸으로 다산은 백성을 걱정했다. 그의 저서들은 모두 고뇌의 문장이며 삼정(전정·환곡·군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목민심서는 다산 저서의 정점이며 전부가 다산초당에서 작성됐다. 그는 당시의 국가를 이렇게 진단했다. “털끝만큼 작은 것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 이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 했다.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목민심서에는, 다산초당에는 200년의 시차를 두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500년을 이어온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남도를 대표하는 종가의 품격이 묻어난다. 해남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의 4대조 윤효정이 지었다. 고산은 82세 되던 1669년 수원의 집을 이곳으로 옮겨 와 본래 있던 종가에 덧대어 지었다. 녹우당은 종가의 기품처럼 고적하다. 덕음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아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녹우당 초입에는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이 있다. 해남 윤씨 가문을 대표하는 윤선도와 윤두서의 생애와 여러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존재 자체로 미덕을 품고 있다. 녹우당의 주변 경관을 헤치지 않도록 지하에 만들었다.특히 녹우당은 건물과 함께 나무들이 아름답다. 오래된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고택의 기품을 더한다. 본채와 사당 사이 담장을 걸어 녹우당 뒤편으로 가면 500년 전에 조성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비자나무숲이 나온다.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뻗어있는 비자나무숲은 아름답고, 숲과 계곡은 녹우당과 어우러져 오래된 것들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무엇보다 녹우당은 다산의 외가이다. 다산초당도 원래 해남 윤씨가 사용하던 것을 녹우당의 후원을 받아 다산이 고쳐 썼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 그러니까 공재의 손녀이다.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다산은 녹우당에서 여덟 수레의 장서를 빌려 읽었다. 다산의 학문적 성과는 녹우당의 조용한 기여 속에서 세상에 나왔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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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와 함께 시간의 강을 건너가 볼까요? 영암 도기박물관·해남 녹청자·강진 청자박물관
그릇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예요. 밥과 국은 어디에 떠서 먹고, 반찬은 또 어디에 담을까요? 인간의 역사는 도구의 역사입니다.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냈죠. 그릇의 시간은 토기로부터 시작됩니다.중학교 역사시간에 밑줄 그어가며 외웠던 신석기 빗살무늬토기 기억하시죠? 바닥이 뾰족합니다. 해변이나 강가에 주로 살았던 당시 사람들이 모래나 흙에 박아서 사용했죠. 토기는 통일신라시대 도기를 거쳐 고려청자로 발전합니다. 조선에서는 백자가 유행이었습니다.‘강해영’은 이 나라 도자기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어요. 통일신라시대 도기의 중심지는 영암이었고요. 더 강조할 것도 없이 강진은 고려 최대의 청자 생산지였습니다. 이름이 다소 생소하실 테지만 도기와 청자 사이, 녹청자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해남이 녹청자의 주산지였습니다. ‘강해영’이 품고 있는 도자기의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볼까요!도자문화의 원류를 만난다!, 영암 도기박물관신석기 빗살무늬토기나 청동기 민무늬토기는 겉면이 거칩니다. 반면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백자는 겉면이 반질반질하고 엷은 유리막 같은 코팅이 되어있지요. 과연 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답은 바로 유약입니다. 정성으로 빚은 토기 겉면에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구워내면 도기가 됩니다.유약은 1200년 전 당시로서는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이었습니다. 유약 발라 구워낸 도기를 최초 대량 생산한 곳을 어디였을까요? 바로 영암 군서면의 구림도기 가마입니다. 그러니까 영암이 고온 유약 도기의 원조인 셈입니다. 1987년 가마터에서 입넓은납작병, 대형항아리, 주름무늬병 등 그릇 도기와 기와나 토관 같은 생활 도기들이 대거 발굴됐어요.그 도기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영암 도기박물관입니다. 1200년을 이어온 도기의 숨결을 체험과 전시를 통해 촉각, 청각, 공감각적으로 경험해요. 흙과 도기를 주제로 한 전시도 매일 열려 한국도기의 깊이와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박물관에 들어서면 ‘김대환 전시실1·2’부터 만날 수 있는데요. 김대환 선생이 기증한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대에 이르는 도기유물 375점을 전시하고 있어요. 전통도기의 모양과 쓰임, 의미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요. 2층의 ‘현대도자실’에서는 전통도예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3층 ‘동강 하정웅 컬렉션 기념실’은 영암군 명예홍보대사이기도 한 하정웅 전생이 영암에 기증한 기술품 중 도자기들만을 모아 기획 전시하고 있습니다.‘녹청자’를 아시나요?, 해남 녹청자1983년 완도 약산면 조약도 동쪽 끝 바다에서 놀라운 것이 발견됐어요. 무려 1000년 동안 바다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완도선이 깨어났지요. 키조개를 캐던 잠수부가 청자 4점을 발견하면서 완도선의 전설은 시작됐습니다. 완도선은 최초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완도선에서는 청자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석 달 동안 3만645점의 청자를 인양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자들의 색깔이 우리가 흔히 알던 고려청자와 조금 달랐어요. 신비로운 녹색빛을 띄고 있었죠.그럼 그 녹청자들이 생산된 곳은 어디일까요? 해남 산이면 진산·초송리 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가마터가 녹청자들의 고향이었습니다. 고려 도자사의 새로운 전환기로 일컬어지는 11세기에 제작된 것인데요. 비색(翡色)의 청자는 고급스럽고 귀족적이며, 조금 차가운 느낌을 줍니다. 반면 녹갈색이나 암갈색, 황갈색을 띤 녹청자는 매우 서민적이며, 투박하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고려 상감청자가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면 녹청자는 지방관청이나 사찰, 재산을 제법 모은 서민들이 사용하던 것이에요.완도선의 발견으로 11세기 녹청자의 모습과 특징, 수요와 공급 과정, 용도와 수용층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그래서 완도선 녹청자는 우리나라 도자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유물로 평가됩니다.난파선에 가득 담긴 녹청자, 어딘가 무척 신비롭지 않나요? 해남 산이면 ‘진산리 녹청자 가마터’를 만나러 갑니다. 11세기 고려시대, 수없이 많은 녹청자를 배에 싣고 내렸던 포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바다였던 땅이 간척되면서 지평선이 보일 듯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요. 겨울 밭에서는 배추 수확이 한창입니다. 배추밭 사이, 웃자란 억새 속에서 진산리 녹청자 가마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눈을 감으면 천 년 전 녹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의 섬세한 손길이 보이는 듯해요. 천 년의 신비로움은 그렇게 해남 들녘에 오래 잠들어 있습니다.같은 색의 청자는 없다!, 강진 청자박물관강진 청자박물관에서는 매일 오묘한 빛의 향연이 펼쳐져요. 진품 고려청자 수만 점이 전시돼 있는데, 모두 다른 빛을 냅니다. 청자는 불의 온도, 흙 성분, 가마 속 산화와 환원 상태, 제작 기술에 따라 빛깔이 모두 다릅니다. 청자의 기본 빛깔은 비취색인데요, 박물관에서 만나는 청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색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천 년을 품어온 청자의 오묘한 색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만 개의 청자는 만 개의 색을 냅니다. 담황색, 녹갈색, 녹황색, 녹회색, 청회색, 회녹색, 담청색 등 색이 다채롭지요. 강진청자박물관에서는 그 청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상현실, 증강현실, 프로젝션 매핑 등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체험할 수 있어요. 체험은 어드벤처 영화를 보듯 몰입감이 매우 뛰어나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지요.강진 청자박물관의 최고 장점은 청자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는 거예요. 100평 규모의 체험장에서는 80명이 동시에 체험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전동물레를 돌려 청자를 빚고요, 문양도 직접 새깁니다. 조각체험은 일정한 형태로 이미 성형돼 반 건조된 청자작품에 조각도를 이용해 글씨나 그림 등을 새겨 넣는 작업입니다. 물컵, 반상기, 꽃병, 매병, 주병, 항아리, 머그컵, 필통 등을 직접 조각할 수 있어요.코일링체험은 점토 1kg으로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직접 만들 수 있고요, 모자이크체험은 종이로 제작된 소형 매병과 주병형태의 합판에 청자파편을 직접 붙여 제작합니다. 체험 작품은 초벌구이와 본벌구이를 거쳐 체험자에게 택배로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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