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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맛이 절반이다! 해남 배추·강진 파프리카·영암 고구마
정말로 내 머릿속에 저장된 추억들을 살펴보면 맛이 절반이다.어머니를 생각할 때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이 기억의 절반이다.어떤 여행지를 가도 나중에 좋았던 그 기억들을 꺼내 보면 맛있게 먹었던 음식만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그래서일 것이다.어떤 지역이건 그 지역을 대표하는 먹거리들이 있다.그 게 있어야 사람의 발길을 잡아끌 수 있다.해남 먹거리 평판의 핵심은 배추다.한국인은 김치 없이는 밥도 제2의 주식이라 칭송받는 라면도 못 먹는 민족이다.김치의 중심은 배추다.해남 배추는 이미 전국을 평정한 지 오래다.배추값이 널을 뛰다가도 해남 배추가 출하되는 순간 가격이 안정될 정도다.강진의 파프리카는 아삭아삭하며 달고,몸에도 매우 유익하다.재배의 역사는 짧지만 금세 맛과 품질로 명성이 퍼졌다.무엇보다 코로나19시절에 건강 음식으로 각광을 받았다.영암 고구마는 붉은 황토가 길러내 맛에 깊이 가 있다.그 맛은 추억을 소환한다.어릴 때 방의 윗목에 발을 치고,가득 쌓아두었던 그 고구마들.시원한 동치미와 함께 먹으면 겨우내 맛있는 간식이 됐던 그 고구마가 눈앞에 선하다.그 배추와 파프리카,고구마를 맛보고 사기 위해‘강해영’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그렇게 추억은 맛이 절반이란 말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킨다.그 각인이 다시 구매로 이어지니,맛의 선순환이다.아삭하고 시원한 배추맛의 최강자,해남 배추말이 필요 없다.굳이 말이 나왔다 해도 전국 최고다,하고 나면 더 첨언할 것이 없다.김장철이 오면 해남 배추를 실어 나르기 위해 전국에서 화물차들이 해남으로 줄 선다.요즘은 또 절임배추도 인기다.수확 후 곧바로 절임공장으로 보내진 배추가 소금물에 들어간다.그 배추가 김치가 되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긴 여정이 해남에서 시작된다.속이 단단해진 가을배추와 단맛을 가득 품기 위해 눈을 견디는 겨울배추,모두 해남이 전국 최고다.해남은 전국 가을배추 재배량의30%정도를 차지한다.겨울배추는 월등하다.전국생산량60%를 가볍고 넘고 정말 많은 해에는80%를 상회할 때도 있다.해남배추는 재배기간이 다른 지역에 비해70일 이상 길다.충분히 키워 배추 속이 꽉 차고,황토땅에서 해풍을 맞고 자라 영양가도 풍부하다.배추는 생육 적정온도가10~20도다.해남은 한여름을 제외하면 늘 그 온도를 유지하고,따뜻한 해풍이 자라는 배추를 감싸 맛을 깊게 한다.해남 배추를 이용해 김장을 하려면 늦을수록 좋다.늦가을 들어 해남의 일교차가 커지면 배추 특유의 단맛이 더욱 강해지고,속이 더 단단하게 차서 맛이 배가 된다.김장이 늦어지면 배추가격은 더 싸지고,김치는 더 맛나다.꿩 먹고 알 먹고,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겨울 배추는 어떤가?이름은 겨울 배추지만 맛은 봄맛이다.겨우내 묵었던 입맛이 해남 겨울 배추로 봄에 담근 새 김치 한 점으로 확 깨어난다.특히 겨울 배추는 추운 겨울에 눈을 맞으며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탄수화물이 당분으로 변해 맛이 달고 부드러워진다.그리하여 남도에서는 김장 김치가 시어질 무렵,겨울 배추로 새 김치를 담가 입맛을 돋우고 봄 식탁을 풍성하게 채운다.아삭아삭 달고,몸이 좋아한다!강진 파프리카농사 무시하면 안 된다.몸으로 하던 농사는 지고,스마트팜이 주목받고 있다.강진에서 파프리카 농사를 짓는다면 거의 파머(Smart farmer)다.보통의 사무직원처럼 출근해 유리온실을 둘러본 뒤 컴퓨터로 온도와 습도를 체크하고,서류작업을 한다.인공지능(AI)이 설치된 유리온실이 알아서 농사를 짓는다.파프리카를 재배하기 좋은 온도와 습도의 기본값을 입력해 놓으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제어한다.외부의 기상 정보는 자동으로 업데이트된다.그렇게 주고받은 정보들은 사람이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난방시스템도 지열을 이용해 친환경적으로 열효율을 높인다.코로나19이후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과일처럼 달콤한 맛을 갖고 있으면서 각종 미네랄과 비타민을 풍부하게 함유한 강진 파프리카의 인기도 치솟고 있다. 2019년73억 원이던 강진 파프리카 매출은2024년96억 원으로 거의30%올랐다.국제적 인기도 늘고 있어 생산량의 상당량이 일본과 대만,미국 등지로 수출된다.파프리카는 비타민C를 비롯해 비타민A와B, E,베타카로틴,엽산,철분 등이 함유돼 있어 비타민의 캡슐로 불린다.특히 비타민C는 딸기의4배,시금치의5배 수준이다.껍질이 두껍고 조직이 견고해 가열해도 비타민이 잘 파괴되지 않는다.강진에서 생산되는 파프리카는 빨강,초록,노랑,주황으로 모두4가지 색이다.파프리카는 신기하게도 그 색에 따라 효능이 다양하다.일단 빨간색은 리코펜과 카로틴이 풍부해 황산화와 항암작용에 좋다.초록색은 철분과 유기질이 많아 빈혈을 예방한다.노랑색은 뇌경색,고혈압,심근경색에 좋은 피라진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주황색은 비타민A가 다량 함유해 피부 노화에 효과 만점이다.강진 파프리카,이쯤 되면 팔방미인이다.황토밭이 단맛을 키웠다!영암 고구마황토를 넘어 적토다.영암의 황토밭들은 붉다.그 황토밭의 대세 작물은 고구마다.고구마는 황토와 찰떡궁합인 작물이다.일반적인 검은 흙의 밭에서 생산된 고구마보다 당도가 훨씬 높다.요즘 소비자들은 단맛이 강한 고구마를 좋아한다.다른 단맛은 몸에 안 좋지만 고구마가 만들어낸 단맛은 몸에 아주 좋다.영암 땅이 기른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은 이유다.어디 그뿐이랴.고구마의 변신은 무죄다.영암에서는 고구마빵과 아이스고구마,고구마칩 등을 만들어 선보였다.고구마를 이용해 만든 가공식품들이 젊은 사람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으니,고구마가 영암 농촌경제의 한 축으로 자라고 있다.영암 황토고구마는 스마트하게 자라고 가공된다.상처에 병원균 침입을 방지하는 큐어링(curing)과 저온 숙성을 거친다.그리하여 당도가 높고 색깔도 선명해 전국 최상품의 명성을 얻었다.건강에도 그만이다.혈압과 스트레스 조절,피로 예방,나트륨 배설과 촉진을 돕는다.비타민A,비타민C가 풍부해 몸의 세포를 보호하고 면역력을 높여준다.식이섬유가 다량 함유돼 소화를 돕는다.먹으면 포만감이 있으나 열량은 매우 낮아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착한 탄수화물’이다.2025년2월,영암에서는‘2025영암 고구마 달빛축제’가 열렸다.정월대보름과 밸런타인데이를 영암고구마의 달콤함으로 잇고 축제였다.군고구마,고구마붕어빵,고구마볼,말린 고구마,아이스고구마 등 다양한 고구마 맛을 즐기고,다양한 문화행사를 곁들였다.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영암 고구마 맛을 즐겼다.영암 고구마의 미래가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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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아, 그 재를 넘어 오라! 해남 우슬재·영암 여운재·강진 풀치재
어느 지역이나 관문 같은 곳이 있다.거기를 통과하면 비로소 여기에 닿는다.그러므로 관문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오래 집을 떠나 세상을 하염없이 떠돌던 사람이 한10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 그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비로소 집에 왔구나,고향에 왔구나,느끼는 그런 곳이 있다.짠하고 애잔하며 늘 마음에 밟히는 곳,세상의 모든 관문은 어쩌면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통로다.해남과 강진,영암에도 그런 곳이 있다.모두 고갯마루로 길이 뻗은‘재’다.우슬재를 넘어야만 해남이고,풀치재를 건너면 강진에 닿고,여운재를 지나야 구름에 달 가듯이 영암이다. ‘산 너머 남촌’에서 남으로 오는 봄바람 같은 곳이다.그 동네 사람이면 누구나 가슴 시린 추억 하나쯤을 가지고 있을 세 개의 재를 넘는다.재마다 사연들이 넘쳐서 발이 무겁다.고향에 다 와서,마지막 힘을 쏟아 힘겹게 넘던 고개는 이제 없다.사람 발길에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던 길도 지금은 다 지워졌다.세 곳의 재 모두 터널이 뚫려 지금은 차를 타고 쉽게 넘는다.그렇다고 그 재들에 담긴 이야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우슬재와 풀치재,여운재를 넘는 그 동네 사람들은 길고 긴 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그렇게 세 곳의‘재’는 그리움이다.소의 무릎을 넘는다!해남 우슬재우슬재를 넘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둘 있다.시인 김남주와 고정희,이미 세상에 없어서 슬픈 두 시인도 고향 해남에 가기 위해 우슬재를 넘었을 것이다.두 시인이 우슬재를 넘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늘 궁금했다.우슬재는 옥천면에서 해남읍으로 넘어오는 길이다.과거에는 외부에서 해남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였다.주변 산세가 소가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을 하여 우슬재(牛膝峙)다.우슬재는 해남의 기질을 드러낸다.그런 전설도 하나,우슬재에 깃들어 있다.옥녀탄금형의 형국을 가진 해남은 토호 세력들의 세도가 드셌다.그 등살에 새로 부임하는 현감들마다 오래 버티지 못했다.어느 해 풍수지리에 밝은 현감 김서구가 부임했다.우슬재에 올라 지형을 살펴 본 그는 해남 토호들의 기를 꺾을 방법을 알아냈다.우슬재 봉우리들을 석 자 석 치씩 깎아내는 것,그렇게 하자 거짓말처럼 토호들이 잠잠해졌고 그는 해남에서 오래 선정을 베풀었다.해남의 대표적인 세력,해남 윤씨가 해남으로 들어온 것도 우슬재와 관련이 깊다.녹우당을 만든 윤효정이 시초인데,그는 원래 강진에 살았다.어느 날 해남 정씨 정호장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데 우슬재에서 큰 빛이 일어나는 것을 봤다.그는 하인을 시켜 우슬재에 가면 어떤 사람이 있을 것이니 시급히 데려오라 했다.하인이 가보니 과연 한 소년이 잠을 자고 있었다.정호장이 그를 제자로 삼아 가르쳤는데,그가 바로 해남 윤씨의 시초 윤효정이다.우슬재는 슬픈 역사도 담고 있다.우슬재는5·18사적지16호다.당시31사단93연대2대대가 주둔했고,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군대 기록에는2명만 사망한 기록으로 기록돼 있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대7명이 죽었다. 2021년에는 우슬재에서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골2구가 발견되기도 했다.월출산,그 장관을 만나는 고개!영암 여운재덕진면에서 그 고개 여운재를 넘으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장관이다.월출산이 파노라마처럼 넓게 펼쳐지는데,바위들이 하늘을 나는 새 떼 같다.검은 새들이 뭉치고 흩어졌다가 다 뭉치기를 반복해 산 하나를 이룬 것 형국이다.산이면서 새고,새이면서 바위다.고개를 넘는 목적이 아니라 오직 월출산의 그 장관을 보기 위해 여운재에 오르는 사람도 많다.여운재는 영암 덕지면 노송리와 금정면 연보리 사이에 솟은 고개다.지금은 터널을 통해 차로 휙 가지만 저 옛날엔 쉽게 오를 수 있는 고개가 아니었다.경사도가 만만치 않은 오르막을1시간 넘게 걸어야 여운재 정상에 닿았다.영암읍에서 보면 동쪽의 높은 산마루로 워낙 산이 높아 구름도 쉬어 간다고 여운재(如雲峙)다.지금은 영암의 복판에 있지만 저 옛날엔 땅과 땅이 나뉘는 경계의 공간이었다.그 고개를 넘어 월출산이 보이면 비로소 영암이었다.조선시대에는 영암 금정면의 행정구역이 나주에 속했다.그 때 여운재는 영암과 나주의 경계였으며 두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였다.기록에 따르면 여운치(如雲峙)라고도 했으며,영원현(嶺院峴)으로 불리기도 했다.여운재 넘어 구름과 만나면 영암이었다.길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다,풀치재한때 강진에서 영암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누릿재였다.누릿재는 강진,해남,장흥,완도 사람들이 광주로 향하기 위해 통과했던 관문이었다.멀지 않은 곳에 넓은 풀치재가 만들어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누릿재만을 애용했다.풀치재를 통하면 월출산 자락을 우회해 영암읍 반송정과 청풍 삼거리를 거쳐야 하지만 누릿재만 넘으면 영암읍 개신리로 바로 연결됐다.풀치재가 일제 때인1930년대 중반 넓은 신작로로 탈바꿈했지만 누릿재의 가까움을 대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1970년대 들어 풀치재를 넘어 영암에서 강진 가는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누릿재는 지워지고 풀치재가 세상의 전면으로 나왔다.풀치재는 영암과 강진의 경계이며,삼거리가 나 있다.하나는 영암,다른 두 길은 강진 작천과 옴천으로 이어지는 길이다.일제시대에 크게 뚫린 풀치재 삼거리는 한때 주변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수행했지만 현재는 통행하는 차량을 거의 볼 수 없다. 2000년‘풀치터널’이 뚫리고, 4차선도로가 나면서 거의 버려진 길이 됐다.풀치재는 불티재,풋치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그러다가 터널이 뚫리면서 풀치재로 통일됐다.국토관리청이 터널 이름을 짓기 위해 풀치재가 속한 강진,영암군과 협의한 끝에 풀치재로 최종 결정했다.길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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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흐르며, 함께 스미며, 함께 일어서며 강진 백운동원림·영암 영보정·해남 방춘정
정자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다가도 순간,정신이 번쩍 든다.그곳에 살았을 옛사람의 우물처럼 깊은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벼슬을 포기하거나 내려놓고 은거해 정자에 들어앉은 늙은 양반의 형형한 눈빛이 정자에는 스며있다.그런 정자들을 보러 가는 길이다.발이 가볍다가도 무겁다.강진의 백운동원림은 집의 주인처럼 아름답고 기품있다.눈 돌리면 모든 풍경이 비경이고,삶의 의미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감탄이 끊이지 않는다.영암 영보정은 쓸쓸해 보이면서도 가득 차 있다.정자 앞 너른 들판이 정자와 함께 흐른다.정자가 논과 사람에게 곁을 내줘 깊은 울림이 있다.해남 방춘정은 강학서원이다.사람을 기르던 곳이다.배움은 사람을 기르고,사람은 다시 세상을 키운다.사람과 배움의 관계,그 오래된 사랑이 방춘정에서는 느껴진다.늘 사람과 함께 서 있는 그 정자들을 보고 있으면 힘이 난다.슬픔이 바닥에 닿아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내면의 풍경들이 거기 있다.그리하여 같이 살아내는 방식을 취하는 정자들은 따뜻하다.세 곳의 정자들은 저 혼자 저물지 않는다.홀로 깊어지기보다 같이 서는 방식이다.정자들은 낮은 산자락에 숨어 있거나 마을 안으로 들어와 있다. ‘밖’에서‘안’을 보면 흐린 윤곽만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지붕의 기와며 현판,나무기둥이 선명해지는 배치다.사람과 함께 흐르고,함께 스미며,함께 일어선다.다산이12경으로 구분한 정자,강진 백운동원림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좁은 계곡을 따라 나무들이 아름다운 길을 걷다 보면 갑자기 선경이 펼쳐진다.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싶다.백운동원림은 월출산 옥판봉 남쪽 기슭,백운곡에 있다.조선 숙종 때 이담로가 조성했다.적적하게 혼자 살던 할아버지 이담로 곁에 그의 둘째 손자 이언길이 찾아와 같이 살면서 백운동원림의 전설은 시작됐다.그로부터12대에 걸쳐 그 집안의‘백운동원림살이’가 이어졌으니 유서 깊다.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복원했지만 원형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다시 지을 때 참고한 그림이 있었다.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살 때 월출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 백운동원림에 들렀다.그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은 다산은 백운동원림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고 살핀 후12경으로 구분했다.그리고 각각의 경관마다 시를 지었다.끝이 아니었다.절친했던 초의선사를 그곳에 데려와 그림을 부탁했다.그렇게 세상에 나온 것이<백운동도>다.시문집과 그림이 화첩의 형태로 아직도 남아있는데,복원할 때<백운동도>를 보고 참고해 다시 지었다.백운동은‘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란 뜻이다.터부터 보통의 공간이 아니다.원림의 깊이는 하늘에 닿는다.담양의 소쇄원,완도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호남의3대 정원으로 불릴 만하다.백운동원림 최고의 깊이는 아홉 굽이‘유상곡수’(流觴曲水)다.유상곡수는 술잔(觴)을 띄울(流)수 있는 굽은(曲)물길(水)을 뜻한다.계곡의 물을 끌어다 바깥 담장 밑으로 난 도랑을 따라 앞뜰에 조성했다.계곡에서 두 차례,계곡에서 끌어들인 물길이 마당에서 다섯 차례 굽이친다.다시 마당을 한 바퀴 돌아서 대문 밖 물길을 타고 원래의 계류로 합해지는 과정에서 두 차례 더 굽어진다.모두 아홉 차례다.다산은 유상곡수를5경으로 꼽았다.우리나라 민간 정원에서 유상곡수가 온전히 보존된 곳은 백운동원림이 유일하다.다산이 최고의 경치로 꼽은 곳은 정선대(停仙臺)다.신선이 머무르는 곳이란 뜻인데,붉은 소나무 군락(‘정유강’ 7경)을 지나 단풍나무가 아름다운 곳(‘풍단’ 10경)을 눈에 담으면 정선대에 이른다.정선대에서 월출산을 보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옥판봉이 장관이다.살면서 신선이 사는 곳을 직접 보고 싶다면 오라,백운동원림으로….마을에 천하가 있다,영암 영보정영보정은 기품 있다.건물의 외형도 그렇거니와 그곳을 만들었던 사람,연촌 최덕지의 삶도 아름다웠다. 1400년대 중반 최덕지는 관직에서 물러났다.영암 영보촌에 내려와 학문에 몰두하다가 오래 머무를 곳이 필요해 사위 신후경과 함께 지은 정자가 영보정이다.최덕지는 학식이 높고 행동이 단정했다.학문이 깊어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거의 현존하지 않는다.다만 후대 여러 학자들의 논설을 통해서만 그의 학문적 깊이가 전해지고 있다.그는 전체를 일으키는 힘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무너진 나라의 정치 기강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길이 향촌에 있다고 믿었다.향촌이 살면 지방이 살고,지방이 살면 나중에 국가가 산다는 변방 중심의 정치 철학이었다.그는 영보촌에서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함께 일하며 작은 개혁을 꿈꿨다.200년 후 그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사람이 최정과 신척익이다.처음 정자가 너무 낡아 사람이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최덕지의 뜻을 이어받았기에 영보정의 행보는 이후에도 빛났다.마을 동계의 회합장소로 사용될 만큼 향촌사회의 중심이었고,향약 정자로는 드물게 그 규모 또한 크다.그 가치를 인정받아2019년 대한민국 보물2054호로 지정됐다.최덕지의 깊은 뜻은 일제강점기로까지 이어졌다.영보정은 인근의 아이들에게 항일정신을 교육했다.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커‘영암 영보 형제봉 사건’을 일으킨다.영암의 농민과 청년들이1932년5월1일 영보정 앞에서 항일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그 해6월4일에는 영보리 형제봉에서 소작쟁의와 항일만세시위가 다시 일어났고,모두73명이 일제에 체포됐다.영보정에 가면 알게 된다.뜻이 깊으면 행동도 크다.사람을 길러 세상을 키우다,해남 방춘정방춘정은 소박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묻어난다.그곳에서 모시고 있는 호랑이 김종서의 형형한 눈빛이 건물에 새겨져 있다.마을 앞에 터를 잡아 사람의 눈높이로 서 있다.방춘정을 읽어내는 코드는 겸양(謙讓)이다.낮게 존재하며 아무도 모르게 높은 뜻을 지향한다.마을 가장 낮은 곳에서 마을 떠받치고 있으므로 어떤 것도 발아래 내려놓지 않는다.방춘정은 방춘서원의 일부다.그러니까 원래는 순천 김씨들의 강학소였다. 1871년 김정순과 김문익이 주도해 건립했다.김종서를 중심에 놓고,선대를 배향하던 삼상사가 있었다.그러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면서 강당 옛터에 방춘정을 건립했다.나무의 질감이 세밀하게 살아있는 건물이다.어느 한 곳도 나무가 만들어내는 선이 반복되지 않고 아름다워 조선 목조 건물의 깊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방춘정의 뜻이 머무는 곳에 순천 김씨 남은 김효우가 있다. 19세에 문과에 급제해 임금인 세종의 큰 총애를 받았다.하지만 세종이 죽고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낙담하여 벼슬길을 버렸다.그는 흑석산 아래 터를 잡은 뒤 동백을 심고,집 하나를 지어 후학들을 길렀다.그의 강학이 유명해져 많은 유생들이 몰려들었다.그렇게 마을이 커지면서 지금의 방춘리가 됐다.그로부터500년 동안 방춘리는 사람을 길러 세상을 키웠다.순자가 그랬다. ‘보는 것보다 마음으로 아는 것이 낫고,아는 것보다 실행하는 것이 낫다.학문은 실천에 이르러 멈춘다.’이 말을 믿음으로 실천한 영토가 방춘정이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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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에 올올한 마음 새기다
원교 이광사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여기 평생 붓끝을 잡으며 살다간 이의 초상이 있다. 그는 조선 후기 학문과 문화의 자주성을 제창한 분위기에서 17세기에 태어난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이다.절해고도 남도 끝 신지도에서 죄인임에도 70세 되던 해 1774년 겨울에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의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여 이듬해 자신의 생일에 완성했다.그의 초상을 보면 23년의 형극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삶의 고단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평온한 눈빛, 가지런한 입술, 다소 처진 어깨와 단정한 의관은 선비로서의 자존감과 삶의 회한과 달관이 한폭의 그림으로 응축되어 나타나고 있다.그는 왕족의 후예로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형제들과 학문을 함께 했으며, 특히 글씨에 특출난 자질을 보였다. 학문으로서는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로부터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적 요체인 양명학(陽明學)을,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으로부터 정통에 바탕을 둔 개성 넘치는 글씨이자 한국의 서예의 큰 줄기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계승하였다.소론이었던 그의 가문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큰아버지 이진유(李眞儒, 1669~1730)는 영조 6년(1730)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노론의 배척을 받아 옥사하였고, 아버지 이진검(李眞儉, 1671~1727) 또한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론이 실각하자 강진으로 유배되어 정미환국(丁未換局, 1727) 때 사면되었지만 질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광사 또한 1755년에 발생한 을해옥사, 곧 영조의 왕위 정통성을 부정한 ‘나주 괘서(掛書)의 변’에 큰아버지 이진유와 아버지 이진검 그리고 자신의 서찰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유형을 받고 1755년 함경도 부령(富寧)에서 시작된 유배살이는 1762년 전라도 외딴섬 신지도(薪智島)로 옮겨져 1777년 8월 26일, 생일 이틀 앞두고 죄인의 몸으로 생을 마쳤다.당대 명문집안으로 남부럽지 않았던 그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되었다. 이로 인해 자손들은 연좌되어 벼슬길까지 막혀버렸고 1908년에 이르러서야 풀렸다. 자신이 극형이 아닌 부령에 유배형을 받았으니 이를 임금의 은혜로 생각하여 51세의 나이를 ‘은령(恩寜) 1세’라 하고 삼월 그믐을 생일로 고쳐 삼았다. 일반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광사는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함경도 유배 시절에 쓴 글을 모아 두만강 남쪽이라는 뜻을 삼아 『두남집(斗南集)』을 펴냈는데, 여기에는 두만강(豆滿江)에 두(斗)를 두보의 <추흥(秋興)> 둘째 수에서 “그때마다 북두성이 가리키는 서울을 바라본다/每依北斗望京華” 하여 임금이 계신 한양을 그리는 마음으로 표현했다. 가문이 참화를 입었지만 그가 자손들에게 “우리 집안 온 식구가 생매장당했으니 이는 오로지 큰아버지 탓이다. 내가 올 봄에 만 번 죽을 고비에 놓였으니 이 또한 큰아버지 탓이다. 그러나 사실은 집안 운수 탓이고, 저마다 운명 탓이니 감히 큰아버지를 조금도 원망치 않는다” 하였으니 집안의 운수와 각자 운명을 받아들이고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전통과 자존감을 잃지 말고 선조의 덕행을 좇아 나가기를 당부하였다.이광사의 집안은 글씨로 이름났다. 그와 팔촌지간인 이광려(李匡呂, 1720~1783)는 <원교선생묘지(圓嶠先生墓誌)>에서 “우리 집안 선조들은 모두 글씨에 뛰어났고, 원교의 증조부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글씨로 가장 이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학의 일환으로 시작한 글씨는 스승 윤순을 만나면서 한층 성장했다. 그가 서른 넘어서야 위부인(魏夫人), 왕희지(王羲之) 등의 고인을 본받기도 했지만 붓글씨의 참뜻을 알게 해준 분은 윤순의 힘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게다가 그에게는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 1696~?)라는 서화골동 수집가라는 친구를 둬서 북위(北魏) 때의 비석은 물론 역대고금의 글씨책 등을 마음놓고 볼 수 있었다.함경도 유령에서 유배살 적에는 글씨로 명성이 높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사방에서 그의 글씨를 받고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화근이 되어 사헌부에서는 죄인의 몸으로 글씨를 가르쳐 선동하였으니 외딴 섬으로 유배보내야 한다고 청했다. 그렇게 삼천리 길을 걸어 전라도 신지도로 옮겼다. 아마도 그는 신지도로 가면서 일말의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조선의 형벌제도는 엄격해서 북쪽으로 유배가면 춥고 물자가 부족하여 살아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남쪽은 반대여서 다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고문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 그나마 붓이라도 빼앗기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컸다.이광사는 망망대해 절해고도 신지도에서 지내는 동안 글씨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옥동 이서가 쓴 『필결(筆訣)』을 이어 동국진체를 계승하는『서결(書訣)』을 펴냈다. 이 두 책은 한국 서예사의 중요한 저작으로 18세기 명나라가 쇠퇴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사상사적 흐름에서 비롯되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고루함을 벗어나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생각의 전환으로 시에는 진시(眞詩), 그림에서는 진경산수(眞景山水)로 나타났으며, 글씨에서는 진한(秦漢)의 전예(篆隸)를 바탕으로 위진(魏晉)시대의 왕희지 등 고인의 필법을 살펴 새롭게 변화를 시킨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구현하였다. 그의 서예를 평한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에서 “획은 높고 멀어서 쓰는데 어렵지 않다. 치우치지 않고 의지하지 않아도 붓 가운데로 쓰면 획이다. 대개 붓끝의 중심으로 가운데로 지나가고 양끝의 뾰족한 털이 같이 움직이면 획의 모습이 자연히 원만하게 된다. 이것이 붓을 곧게 세우고, 붓끝을 펴서 힘을 가지런히 하는 만호제력(萬毫齊力)으로 곧 심획(心劃)이다. 획을 그을 적에 반드시 어깨와 팔을 따라 그 힘이 붓끝으로 내려가게 해서 날과 월과 해를 세어 마음과 힘을 다 기울인 다음에야 이룰 수 있다”하여 과거에 붓을 눕히거나 끝으로 써서 획의 위쪽과 왼쪽을 뭉개져 글씨가 누추해지고 거칠어진 폐단을 심획으로 구현하여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심획은 중봉(中鋒)을 가리킨다.신지도에서 유배살이 하는 동안 그의 명성을 듣고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그의 대한 감시가 느슨해졌는지 몰라도 강진, 해남, 영암 등지의 유서 깊은 사찰 대흥사, 백련사, 도갑사에 그의 글씨가 현판으로 남아 있다. 대흥사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 ‘천불전(千佛殿)’, ‘침계루(枕溪樓)’, ‘해탈문(解脫門)’ 네 점, 만덕사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 ‘만경루(萬景樓)’ 두 점, 도갑사에는 ‘해탈문(解脫門)’ 한 점이 남아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흥사와 백련사의 ‘대웅보전’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르다. 대흥사 현판은 완전한 해서(楷書)로 붓끝으로 획을 그어나갈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운데에 집중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심획을 구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서 고인의 필법에만 그치지 않았다. 대(大)에서 두 번째 획 아래를 경시지게 내려오면서 끝에서 완만하게 처리하는가 하면, 웅(雄)자 첫 번째 획을 비스듬히 꺾어 변화를 주었다. 대흥사 현판이 해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면, 백련사 현판은 해서와 행서가 조화를 이룬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대(大)자 두 번째 획 끝에서 붓끝을 뾰족하게 노출시키는가 하면 세 번째 획에서 행서의 특징인 붓끝을 다시 잡아올리고 있다. 두 현판이 걸렸던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서로 시간을 달리 해서 썼으리라 생각하며 백련사 현판은 마치 대나무의 마디처럼 획을 한번에 긋지 않고 숨을 고르듯이 쉬엄쉬엄 이어가고 있어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광사가 강조하지 않은 심획(心劃)이 붓 끝에 올올한 마음으로 새겼기 때문이다.대웅보전, 좌 대흥사, 우 백련사대흥사는 현판 테두리에 단청 장식으로 마무리한 반면에 백련사는 두 개의 널판으로 나란히 해서 소박하게 걸어둔 점이 이색적이다. 이는 신라 때의 명필 김생(金生, 711~?)의 글씨 ‘만덕산 백련사’ 현판이 법당 안에 걸어둔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게 아니었을까.해남 대흥사 대웅보전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1840년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동년지기 친구인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가 있는 대흥사에 들러 이광사가 쓴 현판을 보고 당장 떼어내라 호통치고 자신의 글씨를 걸게 했다. 그러나 유배에 풀려나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예전 이광사의 현판으로 다시 걸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대흥사 주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口傳)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추사가 살던 시대가 아무리 혼란스러웠어도 국법은 지엄했다. 유배 죄인의 법집행을 다룬 『의금부노정기(義禁府路程記)』에 따르면 서울에서 제주까지 가는 일정은 13일로 정해져 있으며, 만일 늦을 경우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이처럼 국법이 엄격한데도 추사가 행로를 바꿔 대흥사에 들러 친구를 만나고 현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했다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9월 4일에 유배형을 받고 9월 27일에 도착했으니 예정 기일을 넘긴 죄를 추가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역모(逆謀) 혐의의 중죄인임에야 더 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대흥사 침계루대흥사 대웅보전에 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건너야 한다. 베개 삼은 누각이라는 뜻을 가진 2층 누각 침계루(枕溪樓)를 만난다.(사진3, 대흥사 침계루) 행서(行書)로 붓끝 가운데를 눌러 중봉을 유지한채 한 글자씩 써내려가고 있다. 행서는 해서를 다소 빠르게 쓰기 위한 실용적 목표가 있다. 붓을 빠르게 움직이다보니 붓끝이 종이에 닿지 않고 스쳐지나가듯 나오는 비백(飛白) 현상이 나오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이광사는 그렇지 않고 속도를 대흥사 계곡물처럼 완만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물은 동정(動靜)이 동시에 존재하는 자연물이다. 움직이면 소리를 내고, 멈추면 사물을 비춘다. 계곡 물소리에 세상의 잡념을 잊고, 계곡물에 비친 불우한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았을까.백련사 만경루백련사 대웅보전도 마찬가지로 2층 누각 만경루가 있다.(사진4 백련사 만경루)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른 바다를 뜻하는 ‘만경창파(萬頃蒼波)’에서 따왔다. 만경루 글씨는 해서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흐트러짐없이 단아하게 썼다. 가로획과 세로획에서 강진만의 물결을 형상화 한마냥 마디가 출렁치고 있다. 서예에서는 획을 그을 때 한번에 긋지 않고 중간에 한두 번 쉼을 통해 단단하게 굳히게 하는데 이를 ‘마디[節]’, 곧 이광사한테는 심획(心劃)이다. 앞서 대웅보전 현판 글씨에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했는데 이 현판은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이곳에 서면 만경루 앞으로 강진만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되었지만, 높은 데서 아래를 내다보는 조망감은 절로 마음이 크게 열리는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비할 바 아니다. 한편 사대부로서 학문을 익혀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들을 제도하겠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이 꺾인 자신의 처지를 내면화 했을 수도 있다.대흥사 천불전대흥사는 절 경내를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로 위로는 북원(北院)이라 하고 아래로는 남원(南院)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원의 중심 법당이 천불전이다.(사진5 대흥사 천불전) 해서로 붓흘림이 중심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이어지고 있다. 천불전은 1811년에 화재로 불타고 2년 후에 다시 지었다. 경주 기림사에서 옥석으로 천개의 불상을 조성하여 해남으로 운반하는 도중 불상 768위를 실은 배 한 척이 풍랑을 만나 일본에 표류되었다가 1818년에 돌아왔다. 하마터면 768분의 불상이 못돌아올 뻔 했다. 일본 승려의 꿈 불상이 나타나 자신은 해남 대흥사로 가던 길이었으니 일본에 남을 수 없다 하여 돌려받았다는 이야기가 기록에 남아 있다. 표류되지 않은 배 불상 232위와 합하여 비로소 천불이 되었다. 이중 일본에서 돌아온 불상은 어깨에 표식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비록 이광사 사후 40년 후의 일이지만 화재 당시 현판은 어쨌을까. 살아남았거나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이 원본 글씨가 남아 있어 다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이광사의 글씨와 천개 불상이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음을 보노라니 이것이야말로 시절인연이 아닐까.좌 대흥사 해탈문, 우 도갑사 해탈문대흥사와 도갑사에는 ‘해탈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사진6, 좌 대흥사 해탈문, 우 도갑사 해탈문) 둘은 똑같은 글씨이다. 도갑사가 대흥사의 말사이기에 같은 현판을 만들어서 걸었으리라 생각한다. 행서로 둥글게 원을 그리듯이 하면서 끝획에서 붓끝을 들어올려 노봉(露鋒)으로 맺고 있다. 여기서도 앞서 침계루처럼 비백 현상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해탈문은 사찰에 첫걸음을 내는 자리에 있다. 이를 기준으로 성속(聖俗)의 공간이 분리된다. 해탈문 바깥에서는 혼란스러운 차안의 세계이지만 안에서는 차별도 고통도 없는 원만구족한 피안의 세계이다. 18세기 시대적 전환기에 가문의 영락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자신의 재질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가 불국토에서나마 위안을 받지 않았을까. 붓끝에 새긴 올올한 마음이 생생히 살아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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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마한문화연구원 발간보고서
발굴조사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지석묘1기·수혈1기,초기철기시대 수혈1기·구상유구1기,삼국시대 토기가마2기,고려시대 기와가마3기,고려시대 건물지7동과 관련 시설·수혈2기·구상유구2기·토광묘1기,조선시대 건물지5동·옹기가마2기·수혈11기·소성유구7기·구상유구7기 등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고려 및 조선시대의 다양한 성격의 유구들이 확인되었다.각 유적별로 주요 조사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영암 노송리 압곡유적은 고려시대 건물지5동,축대,부속건물지,배수시설,보도시설,마당이 확인되었다.유적의 건물지는 창건기-중건기-개축기의3단계의 운영시기가 확인된다. 1단계는3호·4호건물지를 중심으로 유적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2단계는1·2호건물지를 중심으로 유적의 범위가 확장되고 건물 및 시설물이 새로 조성되는 시기로 가장 전성기에 해당한다. 3단계는 기존 건물 및 시설물들의 개보축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유적은9세기 전반 무렵 천황사와 관련된 소규모 암자 형태로 조성되었고, 10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역로망과 관련되어 원관사찰로 변화한다.이때 사찰의 기능뿐만 아니라 교통과 관련하여 숙식기능이 결합된 원관사찰로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전반 이후에는 기존 건물들을 개보축하면서 고려시대 후기인14세기까지 운영되다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압곡유적은 다량의 기와와 청자류가 출토되었고,특히 영보월(永保????),관(官)명 등의 명문기와와 금동소탑 등 유적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주목된다.압곡유적의 전체적인 연대는9세기 전반부터14세기 전반으로 비교적 긴 시간동안 운영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영암 노송리 노노동유적은 고려시대 토광묘1기가 확인되었다.유적 일대의 원지형 훼손이 심해 토광묘 외 다른 유구는 조사되지 않았다.출토유물은 청동발,청동숟가락,관정이다.노노동 유적의 토광묘의 연대는 청동숟가락의 특징을 통해 고려시대 후기인13세기 후반∼14세기 후반으로 상정된다.영암 아천리 백운유적은 청동기시대 지석묘 상석1기가 확인되었다.유적의 입지는 지대가 높고 경사가 급한 산사면 상부의 곡간부에 해당하여 기존에 지석묘의 입지와는 차이가 있다.그러나 상석의 규모나 형태상 자연적인 석재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따라서 일대에 분포하는 지석묘유적과 관련되어 지석묘 상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채취 및 준비한 석재일 것으로 추정된다.영암 월평리 석산유적은 초기철기시대 수혈1기,구상유구1기가 확인되었다.유구의 성격이 불분명하고 잔존상태가 좋지 않지만 내부에서 출토사례가 드문 삼각형 및 원형점토대토기가 소량 확인되었다.유적의 구체적인 연대 검토는 무리가 있으며,초기철기시대인 기원전 기원전1세기 말~기원후1세기대로 설정된다.영암 안로리 감산유적에서는1지구에서 조선시대 건물지1동, 2지구에서 고려시대 건물지2동,진입시설,수혈2기,소성유구,구상유구2기,주공, 3지구에서 고려시대 건물지1동,기와가마3기가 확인되었다.고려시대 건물지3동은 유구의 잔존상태가 좋지않지만 기와를 사용한 와가(瓦家)이고,청자류들이 출토되고 있어 일반적인 거주지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유적 주변이 고려시대에 안로현 치소로 비정되고 있어,고려시대 건물지는 치소와 관련된 부속 건물이거나 관련자들의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있다.조선시대 건물지는 규모가 작고,대청과 마루 등이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구전과 유구의 정황으로 보아 서당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려시대 기와가마는 기와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급경사를 이루는 사면부에서3기가 확인되었다. 1·2호는 인접하여 나란히 확인되고, 3호는 방향을 달리하여 위치하고 있다. 1·2호는10세기~11세기, 3호는11세기~12세기대에 운영되었다가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영암지역에서 처음 발굴조사된 기와가마이다.나주 덕림리 신덕유적은1지구에서 청동기시대 수혈1기,조선시대 건물지4동,수혈3기,소성유구2기,구상유구6기,토광묘1기,주공이 확인되었다. 2지구에서는 삼국시대 토기가마2기,조선시대 옹기가마2기,수혈8기,소성유구5기,구상유구1기가 확인되었다.유구의 분포는 북쪽사면부에는 조선시대 건물지들이 조성되었고,남쪽 구릉 상부와 사면부에는 삼국시대 토기가마와 조선시대 옹기가마,수혈,소성유구 등이 확인된다.생활공간과 생산공간의 입지가 구분되어 유구들이 조성되었다.삼국시대 토기가마는 중복조성되었고 축소 및 재축조의 과정이 관찰되며,소성부에 단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특징적이다.개배류가 소량 출토되었으며,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조선시대 건물은 총4동으로 하나의 주택으로 파악된다.사랑채와 안채,별당로 구성된 점,생활용 유물이 대부분인 점을 통해 일반적 주택으로 판단되며,건물의 배치,규모 등을 통해 상류층의 거주지임을 알 수 있다.나주지역 일대에는 조선시대 고택으로 파악되며,조성시기는15세기 후반~17세기대로 설정된다.옹기가마는 연소부가 좌측으로 치우친 횡형(타원형)이며,종단면형태는 내외평탄형이다.횡형 연소부 구조는 조선시대 후기의 옹기가마에서 확인되는 구조로 신덕유적 옹기가마는 조선후기인18~19세기가 중심연대로 파악된다.가마와 인접하여 제작관련 소성유구,태토저장수혈 등이 분포하고 있어 옹기의 제작 및 생산과정의 단면을 엿볼수 있다.유적이 위치한 봉황면 일대에는 옹기가마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어 이들과 함께 조선후기의 옹기생산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이상에서 확인된 유구들은 도로노선이라는 한정범위에 조사가 이루어져 유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그러나 발굴조사 사례가 적어 고고학적 자료가 빈약했던 나주와 영암 경계지역의 선사 및 역사시대의 문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초자료들로 일대의 과거모습을 조명하는데 이용될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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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다 했다! 영암, 강진 월출산·해남 두륜산
본디 명성이라는 것은 공간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의 깊이와 비례한다.이름 높은 산에는 그 명성에 걸맞은 절들이 여럿 있기 마련이다.원래는 항상 산이 먼저다.거기 풍경 좋고 산세 수려한 산이 있어서,절이 들어선다.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산의 명성을 절이 절대 뛰어넘지 못하는 곳이 있다.반면 관계가 역전되어 산보다 절이 더 유명한 곳도 있기 마련이다.월출산은 전자다.한강 이남에서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산이니,제 아무리 아름다운 사찰들을 그 땅 구석구석에 지어도 그 명성이 산을 능가하기 어렵다.도갑사에서 월출산을 올려다보면 알 수 있다.산의 깊이가 모든 걸 삼켜버린다.그리고 터져 나오는 외마디 깨달음, “월출산이 다 했다!”두륜산은 후자다.오래 전부터 대흥사가 유명해 두륜산은 대흥사의 수식어처럼 느껴졌다.한때 산 이름 또한 대흥사에서 따왔다.대흥사의 이름은 본래 대둔사(大芚寺)다.두륜산 역시 대둔사의 이름을 따 대둔산이라 칭했다.대둔사가 대흥사로 이름을 바꾸자 대흥산으로도 불렸다.훗날 두륜이란 이름을 다시 얻었는데,산 모양이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지닌 데서 연유했다.달이 길을 나선다,월출산영암과 강진에 걸쳐 있는 월출산은 산 전체가 기암괴석이다.영암이나 강진,어느 쪽에서 봐도 다르지 않다.눈이 닿는 곳마다 숨이 턱 막히는 비경이 거기 있다.조선의 인문 지리학자 이중환은‘택리지’에서 월출산을 두고‘화승조천’(火昇朝天)이라 했다.아침에 하늘을 오르는 불꽃같다는 의미다.빼어난 산세의 아름다움으로 월출산은1988년 우리나라에서20번째로 국립공원에 지정됐다.월출산에는‘하늘 아래 첫 부처’가 있다.하늘 아래 처음이면 땅에서는 가장 먼 곳이다.월출산 구정봉 아래600m고지 거대한 암벽에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불상은 전체 높이8.6m,신체 높이7m에 이른다.서해를 굽어보는 불상의 눈빛은 자애롭다.마애불 근처엔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다.지척에서 부처와 탑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느껴진다.예전에는 마애불과 삼층석탑으로 가는 길이 좋지 않았는데,영암군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하늘 아래 첫 부처 길’을 조성해 놓았다.가장 높은 천황봉은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다.통일신라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정상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월출산 천제단에서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발굴조사에서도 접시,사금파리,향로와 같은 제사 유물이 잔뜩 출토됐다.구정봉은 매우 신비롭다.바위 표면에9개의 구덩이가 있다.바위 표면이 눈과 비,바람을 몸으로 견디다가 침식돼 파인 웅덩이다.웅덩이 안에 있는 물은 여태껏 마른 적이 없다. 9개 전부가 마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긴 가뭄이 들어도 아홉 웅덩이 어느 하나엔 물이 차 있다.그래서 웅덩이가 있는 바위를‘신령암’이라 했다.구정봉은 신비로운 만큼 탄생비화도 여럿 품고 있다.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설이 있고,신라 때 도선국사가 당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디딜방아를 찧었던 자국이란 전설도 있다.영암 구림마을에 유배되어 내려와 살던 한 장군의 유복자인‘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생긴 구멍이라는 전설은 흥미롭다.동차진은 금강산에 들어가10년 동안 도술을 익혔다.그러나 신비한 도술을 정의롭게 쓰지 않고 자신의 만용을 부리는 데 사용하자,옥황상제가 화를 막기 위해 아홉 번의 벼락을 내렸다 한다.달 밝은 밤에 하늘의 아홉 선녀가 멱을 감았던 곳이라는 아름다운 얘기도 서려 있다.월출산‘큰 바위 얼굴’로 유명한 장군바위는 구정봉의 사면을 이룬다.아득한 기암절벽인 이 바위는 멀리서 보면 흡사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바위가 그린 얼굴은 거칠고 투박하며,강인하다.특히 해가 바위 뒤로 넘어가는 해질녘이면 눈 밑과 코 밑에 어두운 그늘이 져 얼굴의 윤곽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구름다리도 월출산의 명소다.길이가54m에 폭은1m인데,한국에서 가장 긴 구름다리다.아득한 절벽에 아슬아슬 놓여있는 구름다리는 시루봉과 매봉 사이를 잇는 현수교다.원래는1978년에 처음 놓여 졌으나 쉼 없는 사람들의 발길에 다리가 늙어200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놓았다.해발510m,지상120m높이 허공을 지나는 구름다리는 산행의 즐거움에 더해 아찔한 두근거림을 선사한다.월출,기암괴석 위로 달이 길을 나선다.하늘에서 내려온 달빛은 땅에 고루 퍼져 사람의 생을 밝혀준다.이름처럼 아름다운 산이다.한국차의 성지를 품은 두륜산나무들이 빛나는 숲을 이루는‘구림구곡(九林九曲)’넘어 두륜산에 든다.두륜산에는 산의 깊이만큼 여러 등산 코스가 있는데,가장 사람들의 선택을 가장 많이 받는 코스는‘대흥사→북미륵암→오심재→노승봉→가련봉→두륜봉→진불암→일지암→대흥사’를 잇는 원점회귀형 산행 코스다.도합6시간 거리다.북미륵암엔 국보가 있다.용화전에 모셔져 있는‘마애여래좌상’이다.고려시대의 것으로 바위암벽에 직접 새겼는데,높이가4.2m에 달한다. 2004년 용화전을 해체 보수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는데,마애여래좌상의 감춰져 있던 실체가 모두 드러났다.불상에 천인상(天人像)이 조각돼 있었다.고려시대 불상으로는 유일한 경우였다.천인상이 발견되면서 마애여래좌상은 이름값이 크게 뛰었다. 2005년,보물 제48호에서 국보 제308호로 파격 승진했다.북미륵암에서 오심재까지는 걷기 좋은 숲길,힘 들이지 않고 무심히 걷기에 편하다.오심재 왼쪽에는 두륜산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 조금만 오르면 닿는 고계봉이 우뚝 서 있다.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노승봉이 아름답다.두륜산의 최고봉은 가련봉이다. ‘부처와 연꽃을 나타내는 봉우리’란 뜻이다.가련봉을 내려서면 곧바로 만나는 만일재는 가을 억새가 유명하다.등산 코스의 말미에 만나는 일지암은 초의선사가‘다선일여(茶禪一如)’을 위해 꾸민 차의 영토다.초의는 일지암에 기거하며 무너져가던 조선의 차문화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그 유명한‘동다송(東茶頌)’과‘다신전(茶神傳)’을 일지암에서 펴냈고,당대의 석학이던 다산 정약용·추사 김정희와 두루 교류했다.그리하여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 평가받는다.초의의 숨결이 지금도 생생하다.그가 차나무에 들어앉아 깊은 향을 음미하던 다정(茶亭)이 있고,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은 돌물확으로 흘러 다천(茶泉)이 된다.그가 차를 끓이던 돌부엌에 서면 한국차의 깊은 향이 두륜산 전체로 천천히 번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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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길,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영암 향사당·강진 마량·해남 어란
7년 임진왜란 때 호남은 국가의 심장이었다.팔도가 왜군의 무력 앞에 쑥대밭이 됐지만 오직 호남이 남아 무너진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었다.호남이 버틸 수 있는 힘은 이순신 장군과 호남의 백성들에게서 나왔다.육전에서의 연이은 패퇴로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다.군신의 의리를 외치던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선조가 돈의문을 지날 때 그의 곁을 지킨 신하는 백 명도 되지 않았다.국왕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대궐에 난입해 노비문서를 관리하던 관청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행렬을 막아서고 비난을 쏟아내던 백성들이 임금의 가마에 돌을 던졌다.왕의 위엄은 바닥까지 추락했다.이순신은 달랐다.전쟁을 미리 대비해 거북선을 만들었고,실전처럼 병사를 훈련시켰다.호남의 병사들과 함께 모든 싸움을 이겼다.그가 지킨 호남의 바다는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했고,금방 끝날 것 같던 전쟁을 장기 국면으로 전환시켰다.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호남의 힘을 딱 한 마디로 정리한다.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했다.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의미다. 400년이 넘게 지났지만7년 전쟁에서 나라를 지켰던 기억을 호남은 땅의 세포 마디마디에 아직 간직하고 있다.이순신,영암을 방문해 사흘을 머물다!1596년 음역9월1일,이순신은 영암을 방문했다.표면적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였고,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내막을 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전황은 급박했다.명나라가 주도한 휴전협정은 서로의 오해만 쌓았고,왜적의 재침이 임박해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됐다.이순신은 또 다시 다가올 전운의 그림자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실제로 이듬해인1597년 기어이 정유재란이 일어난다.1596년 이순신은 길을 나섰다.호남지역을 돌며 백성들을 다독이고,인재를 포섭해 방비를 단단히 하기 위함이었다.이순신이 강진을 거쳐 영암 구림마을에 도착한 것은9월1일 늦은 오후였다.그는 구림마을 향사당에 발을 풀고,그곳에서 잤다.영암에서 그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정랑 조팽년이었다.향사당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둘은 전쟁의 급박한 판도에 대해 논의했다.그리고 조팽년에게 곧 다시 벌어질 전쟁에 대비해 군량 수송을 책임지게 했다.다음날도 이순신은 향사당에 머물며 정랑 최숙남을 만났고,그 자리엔 지역 유림들도 함께 자리했다.이순신은 영암 유림들에게 병참과 전쟁에 필요한 물자 지원을 부탁했고,영암 유림들은 지원을 약속했다.이순신과 영암의 특별한 관계는 최근에서야 다시 집중 부각된다.이순신의 서간첩 덕이다. 9편의 서간첩은 국보 제76호로 지정돼 있는데,그 중3통이 현덕승에게 보낸 것이다.영암의 연주 현 씨 문중이 오래 보관해 오다 이순신 장군의8대손인 영암군수 이능권에 의해 확인,현충사로 옮겨졌다.그 서간첩이 중요한 것은 약무호남 시무국가 때문이다.이순신은 현덕승에게 보낸 서찰에‘가만히 생각해보면 호남지방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썼다.그 문장 안에 임진왜란에서 호남이 차지한 비중이 모두 담겨 있으며,호남은 대하는 이순신의 자세도 들어앉아 있다. 2017년 영암군은 이순신 장군‘약무호남 시무국가 어록비’를 구림마을에 있는 연주 현 씨 종가 앞에 세워 그와의 깊은 인연을 기념하고 있다.12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마량해협을 건너다!정유년4월1일,이순신은 의금부 옥문을 나와 백의종군했다.그리고 며칠 뒤 통곡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조선수군 전부가 칠천량에서 왜군에 대패해 궤멸했다는 비보였다.불행 중 다행으로 전선을 고의로 이탈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끈 전선12척만이 겨우 살아남았다.이순신은 무너진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이순신이 장흥 회진포에서 배설로부터12척의 배를 인계받은 날은1597년 음력8월18일이다.이틀 뒤인8월20일 마량을 거쳐 해남 이진에 닿는다.그 바다에 지금은 강진 마량과 완도 고금도를 잇는 고금대교가 놓여있다.이순신은 마량대교 아래 좁은 수협을 건너며 마음이 조급했다. 12척의 배로 맞서기에 적은 중과부적이었다.마량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는 군사요충지였다.특히 마량은 남해에서 서해를 돌고,한강 수로를 지나 한양에 닿는 조운선의 이동로였다.늘 강한 방비를 하고 있었다.그 오래된 증좌가‘마도진만호성지’다.조선 연산군(1499)축조된 석성이다.종4품 만호가 파견됐으니,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마도진 만호성에는500여 명의 군사가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임진왜란이 터지자 그 부대는 전부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호남의 바다를 함께 지켜냈다.어란포와 어불도 사이 좁은 물길,명량의 전초전해남 어란포,역사 속의 바다였지만 그 물길 위에서 이제 과거의 위용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수군만호가 있었던 수백 년의 세월은 고사하고,어민들이 삼치떼를 찾아 헤매던50년 전의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한때 조선의 전선 판옥선이 떠 있던 그 바다에서는 김과 전복이 자란다.1597년,그 바다에서 이순신은 모진 고문으로 상한 몸을 이끌고 싸웠다.안으로 상처 입은 한 인간의 외로운 전투,어란포해전이다.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거의 전멸시킨 왜군은 수륙 병진한다.진격의 방향은 서쪽이었다.오로지 전라도의 남쪽과 서쪽의 바다만 남아 있었다.이순신은 명량에 이르기 전 어란포에 먼저 진을 쳤다.어란은 명량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이었다.어란포해전은 명량해전의 전초전 개념이다.비록 소규모이긴 했지만 만약 그 전투에서 졌다면 세계해전 사상 최고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명량해전도 없었다. 8월27일 적선8척이 기습을 감행했다.칠천량의 대패로 싸울 의욕을 잃은 병사들을 다독여 이순신은 적과 맞섰다.이순신은 적이 바짝 접근해 올 때까지 기척 없이 버텼다.화포의 사정거리 안에 적선이 접근했을 때 깃발 신호로 공격을 개시했다.적의 선봉은 금방 궤멸됐다.다음날인8월28일 이순신은 어란진을 버리고 진도의 벽파진으로 이동한다.일종의 유인책이었다.명량해전이 있기 전까지 일본 수군은 어란포에 진을 쳤다.이순신은 울돌목의 사지로 적이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전선12척으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이 그것말고는 없었다.일부러 울돌목의 바다를 비웠다.벽파진은 적을 맞아 싸울 수 없는 공간이다.벽파진 동쪽의 드넓은 해역은 이순신만의 사지였으나 울돌목은 적과 이순신 모두의 사지였다.그는 그렇게 명량에서13척의 한줄기 일자진으로 적선330척과 맞섰다.그리고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은 잃었던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다.임진왜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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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초전, ‘을묘왜변’을 아십니까? 해남 달량진성·강진 병영성·영암 영암읍성
오래된 성들을 찾아간다.성들은 침입의 역사를 몸에 간인시키고 있다.모든 성벽은 안으로 단단하다.밖의 침입으로부터 안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처절한 사투는 성벽에 그대로 투영된다.그 벽이 뚫리거나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것은 끝난다.지휘관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백성들이 함께 도륙된다.그러므로 모든 성벽은 가장 절박한 벽이다.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37년 전인1555년,왜선70여 척을 이끈 왜군6000명이 해남 달량진성을 침범한다.그렇게 시작된 을묘왜변은 처참했다.조선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관군을 지휘하던 장수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가공할 화력으로 진군하는 왜적을 막아선 것은 의병이었다. 37년 후 일어난 임진왜란의 양상과 판박이처럼 똑같다.해남 달량진성은 금방 무너졌고,왜군은 조선의‘육군총사령부’인 강진 병영성(兵營城)으로 화력을 집중시킨다.육군 총사령부라는 간판은 허울뿐이었다.왜군은 병영성에 거의 무혈 입성했다.그 다음 목표는 영암읍성,거기서 의외의 복병이 등장한다.해남현감에서 물러나 고향 도암 도포 봉호정에서 시묘살이하던 양달사와 형 양달수가 함께 영암성 안으로 들어와 의병을 모집했다.왜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전까지 헐렁하던 전투가 고전의 형세로 완전하게 판이 뒤집어진 형국이었다.허술한 대비로 처참히 무너진 달량진성오랜 세월이 지나고 달량진의 해변은 평화롭다.이름조차 이진으로 바뀌었다.시간의 더께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던 성벽들은 새로 개축한 흔적이 역력하다.어떤 성벽은 집과 몸을 잇대 그대로 돌담이 됐다.쉼 없는 전투가 이루어졌던 땅에서는 김장배추를 뽑아 소금물에 절이는 일로 주민들의 손발이 고달프다.처절한 싸움의 전선이 고된 생활 전선으로 이동했다.굳이 따지고 보면 적과 싸우는 것이나 생계를 위해 거친 손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비슷한‘생존형 분투’다.달량진성은 이전부터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다. 1483년 왜선이 달량진에 침입해 무명50필,쌀30석을 약탈했다.주민3명도 살해했다. 1522년에도 왜선12척이 달량진에서 약탈을 일삼았지만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방비를 더 단단히 해도 모자랄 판에 조정은 달량진에 있던 수군진을1552년 완도 가리포로 옮겼다.달량진은 종4품 만호진에서 종9품 최하급 권관진으로 격하됐다.사정이 이러니 전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달량진성을 포위한 왜적에 맞서 분전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성은 함락됐다.강진과 영암,장흥에서 달량진성을 구하러 온 원병도 함께 무너졌다.그 전투로 성을 지키던 전라병사 원적이 죽임을 당했고,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로 잡혔다.참으로 허무한 전투였다.전라병사 유사의 도주,텅 빈 병영성에 무혈입성병영성은 조선의 육군총사령부답게 지금 봐도 견고하다.규모도 매우 크다.성벽은 거대한 돌이 촘촘히 박혀 웬만한 대포로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그런 병영성이 을묘왜변에서 놀랍게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함락됐다.달량진성을 함락한 왜적들은 병영성으로 향했다.전라병사 원적이 달량진성에서 전사하자 조정은 다급하게 유사를 새로운 병사로 임명해 병영성으로 급파한다.그런데 유사는6000명에 이르는 적의 규모에 지레 겁을 먹고 병영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장수가 성을 버리자 군사들 역시 줄행랑을 쳤다.그 견고한 병영성을 싸워 보지고 않고 그냥 내준 꼴이었다.왜적들은 텅 비어 있는 병영성에 들어와 식량과 무기들을 챙기고 유유히 사라졌다.병영성이 무너지자 전라도 해안지역 일대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곧바로 장흥성이 함락되고, 5일 후 강진읍성도 적의 손에 들어갔다.왜적들은 관군의 저항 없는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노략질을 일삼았다.오직 해남에서만 현감 변협과 백성들의 분투로 성이 함락되지 않고 겨우 버텨낼 수 있었다.의병장 양달사,고립무원의 영암성을 구하다!왜적들의 다음 목표는 영암성이었다.왜적은 영암 향교에 진을 치고 영암성을 노렸다.성을 방어하던 우도방어사 김경석은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이때 의병을 일으켜 성으로 들어온 사람이 양달사다.그는 오직 백성을 지키기 위해 영암성에 들어와 자기 목숨은 돌보지 않고 싸웠다.그에게 하늘은 백성이었다.양달사는 병법에 능했다.그는 농악대를 조직해 야산 높은 곳에서 뛰놀도록 했다.왜적들이 붉은 옷을 입은 광대패의 놀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양달사는 은밀히 의병들을 이끌고 왜적들의 허리를 급습했다.적이 혼비백산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영암성 안의 관군과 백성들이 공격에 합세해 큰 전과를 올렸다.도망쳤던 왜적들은 곧바로 전세를 규합해 반격에 나섰다.양달사는 군사와 백성들을 다독여 힘껏 싸웠다.전투는3일 동안 계속이었는데,죽은 왜적의 수가100명을 넘었다.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전투가 조선군의 승리로 굳어갈 무렵 나주로 노략질을 떠났던 왜적들이 영암으로 돌아왔다.그들은 거의 궤멸 직전에 놓인 본대를 보고 강진으로 도망쳤다.영암성의 승리는 양달사와 의병들의 승리였다.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양달사는 어떠한 공도 인정받지 못했다.양달사는 개의치 않았다. “공을 자랑하며 상을 구함은 부끄러운 일이다”는 말을 남기고,시묘살이 움막으로 돌아갔다.백성들은 양달사를 외면한 조정을 두고두고 비난했다.을묘왜변이 끝나고 장흥 관가 벽에는‘조정이 을묘년 공신을 제대로 책정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벽서가 나붙었다.영암읍에는 을묘왜변 때 신묘한 능력을 발휘한 양달사를 고증하는 유물이 남아 있다. ‘장독샘’이다. 1555년5월24일 적군이 몰려오자 영암성은 고립무원이 됐다.영암성에 갇힌 백성들은 기갈에 허덕여 여기저기 샘을 파기 시작했다.그러나 어디에서도 물이 솟아나지 않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달사가 장독(장군의 깃발)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그곳을 파자 거짓말처럼 샘물이 콸콸 솟았다.그 샘은 지금껏 보존돼 영암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돼 있다.영암성에 간다면 사욕 없이 오직 백성을 위해 아름답게 싸웠던 그 사내,양달사가 믿었던 하늘을 한 번쯤은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자기의 하늘을 지키는 힘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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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풍경 속에 이야기를 품다! 해남 대흥사·강진 무위사·영암 도갑사
풍경 좋은 곳에는 절집들이 있다. 이 나라 명당에는 죄다 절집들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이름난 산은 그 명성에 걸 맞는 절집들을 거느리고 있다. 대흥사가 그렇고, 무위사와 도갑사도 다르지 않다. 대흥사는 ‘구림구곡(九林九曲)’ 넘어 두륜산에 자리잡았다. 무위사와 도갑사를 품은 곳은 산세 좋기로 정평이 난 월출산이다.세 절집은 다르지만 사실 한 몸이다. 모체인 대흥사(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에서 가지를 뻗은 것이 무위사와 도갑사다. 무위사와 도갑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다. 절집들이 세상에 존재한 시간이 천 년을 넘었으니, 세 절집에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쌓였다. 절집들이 지나온 시간의 마디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꺼내 읽는다. 재미가 쏠쏠하다. 아주 오래 전 할머니가 이부자리에서 전해주던 옛날이야기 같다.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절, 대흥사가을, 대흥사 입구는 나무들이 꽃보다 화려하게 빛난다. 주차장에서 대흥사에 이르는 숲길은 물경 2㎞다. 아홉 굽이 숲길로 이어져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불린다. 길 양 옆으로 떡갈나무, 측백나무, 편백나무가 가득하다. 그 너머엔 동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숲 터널이다. 동백나무, 삼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가 몸을 뒤섞으며 울창한 산림을 형성한다. 숨을 깊게 쉬면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다.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언 위에 떠있는 절이다. 서산은 서천으로 지며 ‘만세불훼지지요, 삼재불입지처’라 했다.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고, 화재·인재·수재가 닥치지 않을 곳이란 의미다. 실제로 신라 말기에 창간돼 별다른 변고를 겪지 않았다. 그 덕에 유명인사들이 쓴 현판이 죄다 남아 있다. 정조대왕이 ‘표충사’, 추사 김정희는 ‘무량수각’, 원교 이광사는 ‘대웅보전’, 이삼만은 ‘가허루’ 현판을 썼다.대흥사엔 절집에 흔한 사천왕상이 없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세울 필요가 없었다. 북으로 영암 월출산, 남쪽엔 송지 달마산, 동으로 장흥 천관산, 서쪽에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다. 사방에서 산들이 액운을 막아주는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에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대흥사의 꽃은 1000개의 불상이 모셔진 천불전이다. 6년의 시간 동안 경주 옥돌만을 써서 정성으로 만든 천불상을 봉안하고 있다.대흥사는 한국에서 13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우리 불교문화의 깊이를 담고 있는 종합승원 7곳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다. 함께 등재된 절집은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이다.무위사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무위사절 이름이 크다. 무위(無爲)는 불교에서 이르는 최고선의 경지다. 무소유, 텅 비어서 가득 채워져 있는 해탈을 지향하는 절이다. 절 이름처럼 가람의 배치도 심상치 않다. 높지 않은 계단들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절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구조다. 무위사 가는 길은 그래서 진리를 찾아 내딛는 걸음 같다.신라 진평왕 39년(617)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전하니 1400년의 시간을 견뎠다. 절집을 태우면 사리가 몇 가마는 나올 세월이다. 진정한 무위는 타인과 더불어 해탈하는 것이다. 무위사의 다른 이름은 수륙사(水陸社)로 저 옛날 수륙재(水陸齎)가 절의 상징이었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혼을 부처님의 불법으로 환생시키는 의식이다. 나만 잘 살면 의미 없으니 더불어 잘 살자는 뜻을 담았다.무위사의 핵심은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다. 서방 극락정토를 현생에서 묘사했는데 작고 소박하며 단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배흘림기둥을 썼다. 기둥은 배가 불룩하고 위 아래로 갈수록 잘록해진다. 무척 과학적인 건축기법이다. 기둥은 밑에서 보면 두께가 갈수록 좁아 보인다. 또 멀리서 보면 무거운 지붕에 눌리는 느낌으로 약해 보인다. 지붕 중간을 부풀려 건축물이 매우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다. 단아하면서 안정되고 기품 있는 무위사 극락보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극락보전은 벽화로도 유명하다. 원래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476에 완성된 것이다. ‘아미타 삼존벽화’와 ‘백의관음도’는 두루마리가 아닌 토벽의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가장 오래 된 후불벽화다.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 불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은 불교미술의 정수다. 극락보전 앞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기교 없이 담백하고 단아한 모습이 극락보전과 닮았다.구름으로 창을 삼고, 안개로 문을 삼는 절집, 도갑사도갑사는 재미있는 전설 하나를 떠받치고 있다. 신라 말(880년) 도선(道詵)이 창건했다. 원래 도갑사 자리엔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도선의 어머니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주워 먹고 임신을 했다. 처녀가 임신했으니 지탄받을 게 뻔했다. 아이를 숲에 버렸는데, 이게 웬걸, 비둘기들이 아이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다. 도선의 어머니는 문수사 주지에게 아이를 맡겨 키웠고, 장성한 도선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지었다.도갑사는 들어서는 길부터 위엄을 만난다. 해탈문인데, 국보 제50호다. 1457년 도갑사가 중건될 때 공사를 시작해 1473년 완공됐으니, 5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겨냈다. 해탈문에는 한 쌍의 금강역사와 문수보살 동자, 보현보살 동자가 서 있다. 현재에 다시 만든 것인데 원래의 문수보살 동자와 보현보살 동자는 도갑사 성보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금강역사 한 쌍만 해탈문을 지키다가 도둑맞아 되찾지 못했다.도갑사엔 ‘월출산 갤러리’가 있다. 절과 그림의 만남이 조화롭다. 원래는 절에서 일하는 보살님들의 처소였는데 작가들에게 내주었다. 갤러리에서는 항상 전시회가 열리고, 절을 보러 왔다가 그림에 취한 방문객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도갑사엔 절이 지나온 시간과 기품을 인증하는 비가 하나 서 있다. ‘도선국사·수미선사비’인데, 2004년 보물로 지정됐다. 비 하나를 세우는데 무려 21년이 걸렸다. 빗돌이 도갑사로 오기까지의 긴 여정이 비문에 적혀 있다. 익산 땅 여산에서 채석해 황산 선박장에서 배에 실려 군산 칠산포를 거쳤다. 서호 앞바다에서 배를 내려 도갑사까지 이송했다. 두 사람은 도갑사의 모체다. 도선국사는 절을 창건했고, 수미선사는 무너진 절을 중건했다. 비문에 영의정 이경석은 도갑사를 두고 이렇게 썼다. “구름으로 창을 삼고, 안개로 문을 삼아 어렴풋이 나타나는 열두 누각이 있고, 물소리에 염불소리, 바람에 깃발소리에는 광명이 흘러나와 삼천 세계를 비추었다.” 절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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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아서 ‘별’이 된 나무들 강진 백련사 동백숲·해남 성내리 수성송·영암 월곡리 느티나무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죠. 정말 그럴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정말 우연처럼 맞아떨어지는 숫자가 하나 있어요. 현재 지구의 인구는 80억 명입니다. 이제까지 지구에 살다간 사람의 숫자는 얼마인지 아세요? 1000억 명 정도입니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의 별이 1000억 개입니다. 지구에 살았던 사람들이 죽어서 모두 별이 돼 ‘우리 은하’를 만든 건 아닐까요?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오래 산 것들은 왠지 슬픕니다. 별이 그렇지요. 정말 오래 살아남은 나무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자리에서 500년 혹은 1000년을 산 나무들은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할까요? 아마도 자기 등걸을 만지며 오래 된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의 숨결을 지금도 제 안에 간직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해질녘 별이 뜰 때 그 나무와 별을 번갈아 보면 사람과 한 몸처럼 느껴집니다.‘강해영’엔 오래 살아서 ‘별’이 된 나무들이 있습니다. 백련사 동백은 세 번 핀다죠. 나무에서 한 번, 꽃모가지째 우수수 떨어져 땅에서 한 번, 마지막은 슬픈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한 번, 피었다 진답니다. 해남 성내리 수성송은 500년 동안 해남읍성 사람들과 함께 걸어걸어 왔습니다. 그 걸음, 별의 행로처럼 길고 아름답습니다. 나무에 금줄이 둘러쳐져 있는 영암 월곡리 느티나무는 당산목이자 마을의 수호신입니다. 500년도 넘게 마을 사람들의 삶과 정성을 지켜왔습니다.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 백련사 동백숲그 거 아세요? 별이 없었다면 사람도 나무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뼈 속에 있는 칼슘 같은 원소들은 별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별이 죽으면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갔습니다. 별이 없었다면 수소나 헬륨 같은 무거운 원소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람과 나무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도 나무도 별의 자식이고요, 결국 원래 한 몸입니다.백련사 동백숲에 서면 나무가 모두 별이란 걸 알게 됩니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1,500그루 동백나무들이 늦겨울부터 이른 봄 사이, 일제히 꽃을 피워냅니다. 동백이 피면 산이 연등을 내건 것도 같고, 무수히 많은 붉은 별들이 빛을 밝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4월부터 꽃이 일제히 지면 땅 전체가 붉어집니다. 어떤 꽃들은 졸졸 흐르는 물 위로 떨어져 별처럼 떠다니기도 합니다. 그 모습들이 유성우처럼 장관입니다.동백꽃의 꽃말은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깊으면 꽃잎 한 점 한 점이 아닌 꽃모가지째 뚝 떨어져 땅에 잠들 수 있을까요? 목숨처럼 그 누구를 사랑한 꽃들이 백련사엔 가득합니다. 동백나무 주변으로 숲길이 잘 다듬어져 있어 걷기에 아주 편합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동백나무숲은 초의선사와 다산이 자주 함께 거닐던 유서 깊은 숲길입니다.다산은 동백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그 화품(花品)은 적으나 잎은 겨울에도 푸르고 붉은 꽃이 많이 달린다.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면 윤기가 나고 아름답게 보이므로 부인들이 소중히 여긴다. 정말 훌륭한 꽃나무이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을 춘백이라 한다.’ 어느 봄, 백련사에서 꽃이 지면, 사람의 마음에 동백이 핍니다.성(城)을 지키다!, 해남 성내리 수성송해남의 중심은 수성송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동헌 앞에 서 있었고, 지금은 해남군청 광장에 버티고 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습니다. 사람이 늘 붐비는 곳에 높이 15m, 거대한 나무가 해남의 ‘랜드마크’처럼 우뚝합니다. 200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성송은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 흔하게 자라는 해송입니다.이름이 독특합니다. 수성(守城), 그러니까 성을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수성송의 시간은 명종 10년(1555)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해 봄, 왜적이 전선 60여 척을 이끌고 해남 달량진을 침범합니다. 을묘왜변인데요, 남쪽 성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달량진이 함락되고, 며칠 후 조선 육군 총사령부였던 병영성이 적의 손에 넘어갑니다. 강진성과 장흥성을 차례로 함락한 왜군은 군사를 나눠 해남읍성과 영암읍성으로 향합니다.고립무원 해남읍성에서는 현감 변협(邊協)이 겁에 질린 백성들을 다독여 전투 태세를 갖춥니다. 변협은 무너진 성벽을 일으켜 세우고, 성 주변에 복병을 배치한 뒤 기습작전으로 왜적을 막아냅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을묘왜변 최초의 승전보였습니다. 조정은 해남현감 변협의 공을 높이 사 장흥부사로 승진시킵니다. 변협은 이것을 기념해 동헌의 앞뜰에 해송을 심었는데, 그 소나무가 바로 수성송입니다.성을 지킨 나무, 500년을 이어온 해남 백성들의 목숨이 수성송 아래에서 자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500년 동안 지지 않는 별, 영암 월곡리 느티나무어떤 나무들은 너무 거대해서 보고 있자면 경외의 마음이 생깁니다. 무척 오래 살아서 나무가 저 혼자 생각하고, 말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월곡리 느티나무가 그렇습니다. 500년을 넘게 살았으니 그 나무 안에 시간의 강이 흘러도 몇 개는 흘렀을 것이고, 사람의 터무니가 몇 만 개는 화석처럼 박혀 있을 겁니다.198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나무의 키는 23m, 하늘을 향하던 시선이 한참을 뻗어야 나무가 오롯하게 담깁니다. 펼쳐진 가지는 그보다 더 큽니다. 큰 기둥에서 11개의 크고 작은 가지가 뻗었는데요, 남북으로 25m, 동서 방향으로는 무려 29m나 됩니다. 그늘도 그만큼 넓어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에게 편안한 쉼을 제공합니다.월곡리 사람들에게 느티나무는 신이고, 조상이며, 오랜 친구입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느티나무를 중심에 두고, 풍악놀이를 했습니다. 나무 둘레엔 항시 금줄을 매달고, 극진한 마음으로 마을의 안녕을 빌었고요.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던 곳도 늘 느티나무 아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그 나무 위를 아이들은 기어올라 웃고 떠들며 시간의 강을 무사히 건넜습니다.월곡리엔 500년 동안 지지 않는 별이 마을 입구에 서서 사람의 길을 환하게 비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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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힐링’이 핀다! 강진 다산 남도 유배길·해남 달마고도·영암 기찬묏길
도시생활 각박하고 힘들다. 어떤 날은 시멘트 도로를 벗어나 온갖 생명들이 무시로 피고 지는 흙길과 산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만 년 동안 비와 눈을 견디고, 다시 만 년 동안 햇빛과 바람을 견딘 산길 위에 서면 마음이 무장 해제된다. 그저 편안하게 걸으면 머리는 맑아지고, 몸은 강건해진다.강진의 ‘다산 남도 유배길’은 마음을 치유하기에 좋다. 길이 품고 있는 사연들이 곡진하다. 자기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유배의 길로 혼자 내팽개쳐진 다산에 비할 바 못 된다. 그 길에서는 큰 상처가 작은 상처를 위로한다. 해남 ‘달마고도’는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다. 그 길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달마의 언급처럼 ‘휑하니 비어있어 비어있는 것조차 없는 순간’이 온다. 영암 ‘기찬묏길’은 수려한 월출산의 풍광을 보며 무작정 걷기 좋다. 놀며 걸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길 위에서 마음의 ‘힐링’이 핀다.동백처럼 겨울에 더 뜨거운 길, 다산 남도 유배길생각의 가지가 다산(茶山)에게로 향하는 길에서는 늘 경외의 마음이 핀다. 삶이 늘 고비였으나 생의 고삐를 한 번도 늦추지 않았던 사람. 쉬지 않고 기록해 결국 초라한 삶 위에 눈부신 갱신을 피워냈던 사람. 다산의 정신은 늘 자기 안에 있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언제나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오직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오랜 꿈을 이루는 것에 미약한 힘을 보탰다.그 다산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다산 남도 유배길은 60㎞가 조금 안 된다. 월출산 누릿재로부터 시작해 강진 사의재를 거쳐 백련사,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이다. 사의재(四宜濟)에서부터 길을 시작한다. 다산이 강진에서 처음 몸을 의탁했던 곳은 동문 밖 주막집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아무도 사학을 믿는 대역죄인과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오직 동문 밖 주막의 늙은 할머니가 다산에게 뒷방 한 칸을 내줬을 뿐이다. 다산은 비좁은 그 방에 사의재라는 당호를 붙이고 글을 썼으며 제자를 길렀다. 다산은 사의재에서 1805년 겨울까지 지냈다. 방 한 칸이 전부인 초라한 사의재에서는 치욕을 견딘 다산의 슬픔이 느껴진다.남도 유배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백련사 동백숲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2㎞ 산길이다. 동백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동백숲 옆으로 작지 않은 차밭도 만들어져 있다. 깊은 겨울에도 푸른 동백은 다친 마음들을 위로한다. 동백숲이 워낙 깊고 넓어 붉은 꽃잎이 맺히면 산이 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산은 그 길을 쉼 없이 오갔다. 다산보다 열 살 아래인 백련사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둘은 만덕산에서 나는 차를 마시며, 생각을 나눴다. 다산은 자정 무렵에도 횃불을 들고 혜장선사를 보러 길을 나서기도 했다. 다산(茶山)이란 호도 거기서 나왔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렸고, 다산은 호로 가져다 썼다.백련사와 다산초당 중간쯤엔 해월루가 있다. 다산은 거기서 자주 저 멀리 구강포 앞바다를 내려다봤다. 바다가 열리는 그곳, 거기서 배를 타면 멀리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약전을 만날 수 있다. 형제는 살아서 다시 만나지 못했고, 유배길에 남겨진 사랑이 현재에 닿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 달마고도길이 만만치 않다. 달마산은 가파른 바위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해발 489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산세가 거칠어 오르기 힘든 산이다. 미황사에서 시작해 큰바람재, 노시랑골, 몰고리재 등 달마산 주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17.74㎞의 달마고도 역시 다르지 않다. 원래 있던 길에 인공적인 것을 거의 가미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힘으로 길을 냈다. 자연과 순응하기 위해 중장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출가길(2.71㎞), 수행길(4.37㎞), 고행길(5.63㎞), 해탈길(5.03㎞), 모두 4개 코스로 이루어진다. 달마고도는 이름처럼 달마가 낮달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처럼 더디고 힘겹다. 그런데 정말 달마는 이곳에 왔을까? 고려 때 일이다. 중국 사신이 해남 땅끝에서 산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듣기로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저 산이 그 산인가?” 주민의 답변은 “그렇다”였다. 사신은 산을 향해 예를 행하고 그 산을 그림으로 그려갔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 정작 달마는 죽은 곳은 중국이다. 죽고 3년 뒤 되살아나 부처의 몸으로 인도로 되돌아갔다 한다. 다만 미황사의 옛 기록은 달마가 인도로 간 것이 아니라 해남 땅끝으로 왔다고 주장한다.몸은 좀 고되지만 달마고도에서 만나는 풍경은 아름다움의 끝이다. 하염없이 펼쳐지는 기암괴석은 액자처럼 아름답고, 저 멀리 보이는 땅끝마을 해안은 꿈인 듯 고즈넉하다. 걷다 보면 수없이 많은 너덜겅과 만나게 된다. 그 바위무더기에 앉아 햇볕을 받으면 해탈한 스님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달마고도가 품은 깊이의 절정은 깎아지른 바위 벼랑 사이에 차곡차곡 돌을 쌓아올려 다진 터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도솔암이다. 의상대사가 미황사를 세우기 전에 수행정진하기 위해 지었다. 정유재란 때 불 타 없어졌던 것을 2002년 법조스님이 오대산 월정사에서 내려와 지었다. 도솔암 작은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 낮달이 떴다.맥반석과 피톤치드로 기(氣)충전, 기찬묏길몸에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다. 영암 기찬묏길은 오직 걷기 위해 만들어졌고, 걷는다는 행위만으로 잃었던 기력을 ‘풀충전’할 수 있다. 걸으며 월출산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이니, 움추러들었던 허리가 반듯하게 펴진다. 그러므로 기찬묏길은 가장 사람친화적인 길이다.기찬묏길은 호젓한 산길이었다가 사람살이가 옹기종기 피어나는 오솔길이 한없이 뻗는다. 평지이거나 완만한 경사가 대부분이어서 걷기 쉽다. 길은 편하지만 풍경까지 만만한 것은 아니다. 월출산의 숲은 호젓한 평화를 주고, 바위와 물은 맑은 기운을 던져준다. 걸으면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인데, 과학적으로도 증명됐다. 월출산은 맥반석이 많고, 편백나무들은 피톤치드를 품어낸다. 피톤치드와 맥반석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신체의 상처와 염증을 치유한다.기찬묏길은 4개의 코스로 구성된다. 천황사야영장에서 기체육공원까지 약 4.5km는 생태(자연)의 길이다. 기체육공원에서 기찬랜드까지 2.0km는 힐링의 길이며, 기찬랜드에서 도갑사까지 6.5km는 배움의 길이다. 도갑사에서 왕인박사 유적지까지 2.0km인 왕인의 길, 총거리는 15㎞ 남짓이다.그 길 속엔 특별한 길이 하나 더 숨어 있다. 국민여가캠핑장에서 산성대 탐방로 입구까지 660m 구간으로 조성된 ‘황토맨발길’이다. 맨발 걷기의 효능은 특별하다. 부드러운 황토가 발에 기분 좋은 자극을 줘 소화 기능, 면역, 혈액순환, 뇌 건강 향상에 큰 도움을 준다. 고운 황토 입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맨발에 다져지고 다져져 반들반들 윤을 낸다.걸으며 문화의 숨결도 느낄 수 있다. 월출산 아래 자리잡은 기찬랜드는 천황봉에서 발원해 맥반석을 타고 내려온 계곡물을 수원으로 하는 천연 자연풀장, 여름엔 발 딛을 틈이 없다. 가야금산조기념관, 한국트로트가요센터, 조훈현 바둑기념관, 곤충박물관도 기찬랜드 안에 있어 볼거리·놀거리가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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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땅을 키운다! 강진 병영 한골목·해남 우수영 마을·영암 구림마을
시간을 오래 견딘 것들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강해영’엔 시간 속에서 피어나 기어코 꽃이 된 마을들이 있다. 그 마을들은 오랜 시간을 견뎠다. 발길 걷는 곳, 눈길 닿는 곳마다 가슴 저린 역사이고 문화다. 그 마을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강해영’이 건너온 시간의 강을 오롯이 건널 수 있다.강진 병영에는 조선육군총사령부였던 병영성과 함께 한골목이 있다. 길고 길어 십 리를 이어지는 골목엔 하멜이 쌓은 돌담이 아름답다. 해남 우수영 마을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왜선 330척과 판옥선 13척의 싸움을 우수영 마을은 아직 기억한다. 영암 구림마을은 2200년 동안 이어져온 유서 깊은 땅이다.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태어난 마을, ‘전설의 고향’보다 더 오래됐다.하도 길어서 십리 골목, 강진 병영 한골목강진 병영은 수인산, 성자산, 별락산, 화방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마을 전체가 역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병영’은 병마절도사영의 준말,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군사도시였다. 전라 병영성은 조선 500년 동안 전라도 육군의 총사령부였다.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광주 송정리)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이 옮겨왔다. 병영성은 초대 병마절도사인 마천목 장군 때 축조됐다. 장군이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했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불린다.병영성을 곁에 둔 마을에 십 리를 이어지는 길이 있다. 500년쯤 된 돌담길이다. 병영마을은 표류기를 쓴 하멜과 그 일행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한적한 골목을 거니는 길이다. 흙을 깔고 돌을 빗살무늬로 세우고, 또 흙을 깔고 다시 돌을 반대 방향으로 세우는 방식으로 만든 돌담이다. 우리나라에서 병영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돌담 양식이다. 돌담을 쌓는 방식은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했던 네덜란드인 하멜과 연관이 깊다.동인도회사 직원이었던 하멜은 1653년 가파도에 표류해 먼저 한양으로 압송됐다. 1656년부터 병영으로 옮겨 억류생활을 이어갔다. 1663년 여수를 거쳐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하멜은 무려 7년 동안 병영에서 억류생활을 했다. 빗살무늬로 세운 하멜 방식의 돌담들은 400년이 조금 안 됐고, 우리 전통 방식으로 열 맞춰 세운 돌담들은 500년 정도 됐다. 하도 길어서 ‘한골목’이다. 한골목의 돌담은 2m를 훌쩍 넘을 만큼 높다. 돌담이 이처럼 높은 이유는 병영과 관련이 있다. 말을 타고 출입하는 군관들이 많았던 탓이다. 백성들은 말을 탄 군관들이 안을 볼 수 없도록 담을 높게 쌓았다.마을 가운데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마을 어느 쪽에서 보아도 보일 만큼 은행나무는 크고 오래됐다. 800살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는 돌담이나 성벽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태어나 그간의 시간을 지켜봤다. 낯선 땅에서 억류돼 노역에 시달리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던 하멜 일행에게 그늘이 돼 주기도 했을 것이다. 나무 근처 고인돌은 병영에 자리 잡은 인간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됐음을 증언한다.거친 명량의 숨결, 해남 우수영 마을케이블카가 다니는 우수영관광단지는 세련된 모습이다. 지척의 우수영 마을은 느낌이 조금 다르다. 소슬하게 가라앉아 있는 해변마을 풍경인데, 벽화와 조각들이 담백한 멋을 낸다. 마을이 큰 규모를 갖춘 것은 세종 22년(1440년)이다. 해안 방어를 위해 전라우수영을 옮겨 와 당시로서는 거대한 규모의 군항(軍港)을 명량의 만 안쪽으로 세웠다. 양도(羊島)가 회오리치는 명량의 거센 물살을 막아주는 천혜의 입지다.해안 북쪽에 솟은 구릉 주변으로 돌을 둥그렇게 쌓아 성을 만들었다. 동서남북 4대 문을 짓고 성안에 관청과 객사를 두고, 북문 밖으로 망해루와 북장대를 세웠다. 동문 밖에는 명량대첩 비가 세워져 있다. 전라우수영은 군항 중 가장 규모가 큰 석축 성곽으로 둘레가 1,872m에 이르며, 높이 또한 4m로 비교적 높다. 성의 둥근 성벽에는 지금은 사라진 4대문과 각종 관청들이 무성한 소문처럼 그려져 있다.2015년부터 우수영 마을은 오랜 전통과 현재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문화마을로 거듭났다. ‘우수영 문화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된 것인데, 미술인들과 함께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쇠락한 마을을 재생시켰다. 우수영 사람들의 삶을 담은 벽화, 조각, 설치 작품들은 정겹다. 법정스님의 생가터에 조성된 ‘인문학 하우스’에 들어서면 생각이 맑아진다.동문 밖 명량대첩비와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의 생애처럼 빛난다. 이순신이 명량에서 돌파한 것은 스스로의 안위나 따르던 병사들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그 바다에서 숨이 멎기 직전의 조선이 기적처럼 살아났다. 명량의 물살은 바뀔 때마다 삶과 죽음의 전복을 일으킨다. 그 물살의 변화가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채택한 유일한 전법이었다. 명량의 물살 위에 외로운 일자진으로 버텨 끝내 이겼던 군사들의 사투를 명량대첩비는 기록하고 있다.2200년의 시간을 품다! 영암 구림마을영암 구림마을, 까마득한 시간 동안 마을이 거기 있었다. 삼한시대부터였으니, 무려 2200년이다. 마을이 영암이란 지명보다 더 오래됐다. 영암이 영암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경덕왕 16년이다. 서기 757년으로 1300년이 안 됐다. 2200년 동안 느린 걸음으로 지금에 이르렀으니 마을은 존재 자체로 시간의 지층이다.구림에서는 지금은 역사 자체가 된 인물도 많이 나왔다. 일본에 학문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 왕인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도선국사도 구림마을 사람이다. 지명도 도선으로부터 유래했다. 도선의 어머니는 물길에 떠내려온 참외를 먹고,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다. 그 아이를 내다버렸는데, 비둘기가 감싸 길렀다. 비둘기 구(鳩)에 숲 림(林), 그래서 구림이다.구림마을은 한국 도기가 탄생한 곳, ‘도기박물관’에서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체험하며 한국 도기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도 품고 있다. 하정웅 부모의 고향이 영암인 인연으로 그는 미술품 3400여 점을 기증했고, 그것들을 모태로 구림마을에 미술관이 지어졌다.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전통도 살아 숨 쉰다. 1565년 조선 명종 때 시작된 구림대동계다. 구림마을 한복판에 굵은 노송에 둘러싸인 건물, 회사정이 있다. 지금껏 유지되는 구림대동계의 집회 장소다. 대동계의 규율은 엄격했다. 불효한 자, 연장자를 능욕한 자, 패악무도한 자, 풍기문란한 자에게 모진 매를 때렸다.왕인박사유적지는 세월이 기품이 느껴진다. 그가 태어난 성기동 집터, 그가 공부했던 옛 서당 ‘문산재’와 ‘양사재’ 등이 있다. 왕인은 일본에 문화를 심었다. 일본 조정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함께 건너 간 기술자들을 통해 아스카문화를 꽃 피울 기술도 전했다. 구림마을의 힘이 일본을 키운 것이다. 구림마을에 가면 알게 된다. 땅이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다시 땅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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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식도락여행 1번지, 전라도 ‘손맛’ 영암 독천식당·강진 설성식당·해남 본동기사식당
음식은 손맛이라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맛’일 것이다. 삶에 지칠 때 어머니 손맛이 그리운 것은 어머니에게서 음식을 받아 먹어온 시간이 뇌리에 오래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음식이 간직해 온 시간, 그러니까 음식에 담긴 여러 사연들이 맛을 배가 시킨다. 음식 안에는 바다가 육지가 되고 까까머리 꼬마가 백발노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담긴다. 음식은 삶이다.영암 독천식당의 갈낙탕은 땅이 걸어온 시간을 담고 있는 음식이다. 지금은 영산강 하구둑으로 바다가 막혔지만 한때 독천엔 질 좋은 ‘뻘밭’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세발낙지는 맛이 야들야들해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다. 강진 설성식당은 전라병영성을 찾은 외지인들에게 전라도의 깊은 맛을 선사하던 곳이다. 연탄에 구운 돼지불고기가 메인인 서민 한정식이다. 해남 본동기사식당은 제 때 식사하기 어려운 운전기사들의 허기진 속을 달래주던 곳이다. 15가지 찬이 따라 나오는 갈치조림백반은 주머니 사정 가벼운 운전기사들에게 가성비 좋은 천국을 선사했다.소갈비와 낙지의 이유 있는 만남, 독천식당 갈낙탕영암 학산면 독천, 갈낙탕을 하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낙지 음식 거리’다. 쇠락한 시골에 식당들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 그 식당들은 존재 자체로 독천이 갯마을이었던 저 옛날을 회고한다. 하구둑이 막아지기 전 독천은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하구 갯벌이었다. 거기서 잡아올린 뻘낙지는 천하명물이었다. 지금이야 무안낙지가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영암 독천낙지에 명암도 못 내밀었다.어디 그뿐인가. 오일장에는 우시장이 열렸다. 독천이란 마을 이름도 우시장과 영산강에서 유래했다. 송아지 독(犢)에 하천 천(川)이다. 질 좋은 낙지가 푸지고 소고기가 넘치니 둘이 만나 갈낙탕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갯벌이 파괴되고, 우시장은 무너졌지만 시간의 유산처럼 갈낙탕이 남아 지역경제를 일으켜 세운다.주문한 갈낙탕이 나왔다. 커다란 갈빗대에 반질반질한 낙지 머리가 그릇 위를 떠다닌다. 갈비탕의 녹진한 맛에 낙지가 더해져 국물이 시원하다. 오래 고운 갈비와 적당히 익은 낙지가 보드랍게 씹힌다. 이건 뭐, 두말 할 것도 없이 몸이 건강해지는 맛이다. 갈낙탕의 태생부터가 그렇다. 삼복더위에 지친 독천의 소가 뻘에서 기어 올라온 낙지를 잡아먹고 벌떡 일어나 기운을 차리는 걸 보고 만든 음식이라 한다.믿거나 말거나인 탄생 ‘썰’이 하나 더 있다. 어느 노파가 갈비탕을 끓이는데, 옆에 둔 산낙지가 제 발로 냄비로 기어 들어갔더란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국물 맛이 너무 개운해 갈낙탕이 탄생했다는 비화다. 사람들 입맛 까다로운 요즘, 갈낙탕 하나로 승부를 보진 않는다. 낙지 연포탕, 낙지 초무침, 낙지 탕탕이, 불고기 낙지전골도 인기다.빈 방에 밥상째 들어오는 서민한정식, 강진 설성식당 불고기백반주문이랄 게 없다. 식당에 들어서면 “뭐 드실래요?”가 아니라 “몇 명이세요?”란 질문이 날아온다. 메뉴는 오직 하나 연탄 불고기백반이다. 지정해 준 방으로 들어가면 일단 당황한다. 아무것도 없다. 5분쯤 지나면 의문이 풀린다. 종업원 두 명이 잘 차려진 음식을 밥상째 들고 들어온다. 50년 넘게 고수한 영업 방식이다.메인인 연탄 불고기에 삭힌 홍어, 조기구이, 토하젓, 갈치속젓, 두부, 계란말이, 더덕무침, 각종 나물 등 20여 가지 반찬이 상을 가득 채웠다. 반찬 놓을 자리가 모자라 일부는 2층으로 쌓았고, 젓가락 놓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음식이 빽빽하다. 1인 1만3000원에 받는 전라도 한정식 밥상이 따로 없다.주인공은 역시 돼지 불고기다. 연탄불에 재빠르게 구워 타지 않고, 불향을 고기에 은은하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비법이다. 아주 적당한 매운맛에 불향이 조화롭게 스며들어 젓가락 쉴 새가 없다. 토하젓도 별미다. 강진 토하는 예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조선 시대 궁중 진상품으로 한양에 갔던 음식이다.설성식당이 자리한 병영은 조선 500년 ‘육군총사령부’ 병영성(兵營城)이 있던 고장이다. 병영성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조선 서남부 지역 최대 상업 지역이었다. 해상 무역과 상업이 번성하면서 유동 인구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먹을거리들이 발달했다. 그것을 모아모아 한상에 저렴하게 담아낸 것이 설성식당 불고기백반이다.돈 1만2000원에 15첩 만찬, 본동기사식당 갈치조림백반물가가 하염없다. 월급은 제자리걸음인데, 물가는 하늘을 뚫을 기세다. 자고 나면 오르고 또 오르니, 김치찌개가 만 원을 넘어선 고물가 시름의 시대다. 기본 갈치조림에 그 귀하다는 전복장까지 등장하는데 가격이 1만2000원이다. 그마저도 얼마 전까지 1만 원을 고수하다가 하염없는 물가 급등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인상한 금액이다.상이 차려지면 이 가격에 이런 밥상이 가능하다고, 의문이 든다. 해남에서 생산한 갯것들이 상 위를 가득 채운다. 갈치조림에 전복장, 꼬막무침과 전어무침까지 출동한다. 맛과 양, 가격의 삼위일체가 완벽한 조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는 게 퍽퍽한 기사님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다 보니 무턱대고 가격을 올릴 수 없었다. 지금은 꽤 이름나 기사 손님들보다 땅끝마을을 찾은 외지인들이 더 많지만 저렴한 가격을 식당 전통처럼 유지하고 있다.메인 요리인 갈치조림은 죽은 입맛을 살린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자글자글 끓여주던 딱 그 맛이다. 매콤하고 짭조름하면서 뒷맛이 시원하다. 갈치 살은 촉촉하고,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무가 옹숭깊은 시원한 맛을 낸다.허기진 배를 듬직하게 채웠으니 식당 문을 나서면 눈이 호강할 차례다. 북위 34도 17분 38초, 한반도 땅덩어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땅끝마을이 지척이다. 횃불 모양 땅끝전망대에 서면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진도가 코앞이고, 저 멀리 흑일도와 노화도, 보길도가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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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영, 신나는 축제 속으로 ‘풍덩’ 강진 청자축제· 해남 미남축제·영암 왕인문화축제
맛있다. 멋있다. 신난다. 재미난다. 그리하여 마음보다 먼저 발이 축제가 열리는 ‘강·해·영’에 도착한다. 저마다 색깔이 분명하다. 강진 청자축제에서는 천년을 이어온 청자의 매혹적인 비색에 취한다. 해남 미남축제는 한반도의 땅끝, 해남이 길러낸 온갖 산해진미로 혀가 즐겁다. 영암 왕인문화축제는 백리 벚꽃길에 몸이 먼저 잠기고, 구림마을이 지나온 시간의 숨결에 마음이 흠뻑 빠져든다.세 지역의 축제는 주제에 따라 모양이 각기 다르지만 확실한 공통점이 있다. 가면 즐겁다는 것이다. 어느 축제를 가나 오감 폭발하는 재미 속에 ‘풍덩’ 빠져든다. 강·해·영의 액기스를 응축해 담아놓은 지역축제, 그 매력의 블랙홀에 한 번 빠지면 영영 벗어날 수 없다. 궤도를 이탈한 별처럼 즐거움의 늪으로 무한 직진이다.천년의 색에 물들다!, 강진 청자축제강진은 물 맑고 흙이 좋아 도자기 주산지로 명성이 드높았다. 탐진강 따라 뱃길도 뻗어 한양에 닿기 편했다. 고려 때부터 14세기까지 무려 500년 동안 청자문화를 꽃피운 강진, 그 찬란한 청자의 역사는 현재도 유효하다. 지금껏 국내에서 발견된 400여 기의 옛 가마터 중 200여 기가 강진에 있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급 청자유물 중 80%가 강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강진 청자축제는 찬란했던 역사를 현재로 끌어와 청자와 놀며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배우는 놀이터다. 축제의 주인공은 역시 청자다. 고풍스런 멋을 지난 전통 청자부터 현대적 감각으로 다양하게 재해석된 청자들이 상설 전시돼 눈이 호강한다.눈으로만 보고 끝이면 섭섭하다. 청자축제의 단연 인기상품은 도자기 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청자 체험프로그램이다. 방문자들이 청자를 직접 만들어보며 청자의 세계로 흠뻑 빠져든다. 점토를 빚어 청자의 형태를 잡고 유약을 바른다. 전통가마에서 직접 구워 도자기의 색과 형태가 변화하는 과정을 몸으로 체득하며 청자의 정교함과 예술성을 알게 된다.축제에서 먹을 게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강진 대표 특산물인 연잎, 바지락, 파프리카, 쌀, 김 등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 청자모양을 본 뜬 독특한 디저트와 간식들은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청자에 예쁘게 세팅된 음식과 음료는 너무 예뻐 먹기에 아까울 정도다.잠든 혀를 깨운다!, 해남 미남축제해남은 광활한 농경지와 청정바다를 품고 있는 곳이다. 해남 어디를 가나 배추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바다로 나가면 양식김이 넓게 깔렸다. 붉은 황토가 키워낸 고구마는 보는 순간 입맛부터 다시게 한다. 재료가 풍성하니 해남 맛을 찾아온 식도락 여행객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빈번하다.해남에서 뭘 먹지? 이 질문을 단번에 해결하는 답이 바로 미남축제다. 해남 맛의 시작은 해남 8미다. 떡갈비, 삼치회, 황칠오리백숙, 닭 코스요리, 보리쌈밥, 한정식, 생고기, 산채정식까지 해남은 푸짐한 맛의 대명사다. 해남 8미를 포함해 대흥사 사찰음식, 조상들의 지혜로 발효된 각종 장, 고구마, 쌀, 김요리 등을 총망라해 해남 맛의 끝을 보여주는 게 미남축제다. 얼굴이 잘 생겨서 미남이 아니고 맛있는 남쪽, 미남(味南)이다.축제가 열리는 기간은 10월의 끝이거나 11월 시작이다. 이제 갓 수확한 농산물이 넘쳐나는 때다. 원래 맛있는 해남 음식을 제철에 즐기니 맛은 배가 되고, 건강에도 그만이다. 우리 민족은 모두가 맛에 진심이다. 축제장을 옮겨 다니며 해남의 맛을 입에 넣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고, 곧바로 천당 직행이다.놀거리도 풍성하다. 축제가 열리는 곳은 두륜산 도립공원이다. 대흥사에서 가을 단풍을 만끽하고 가족과 함께 케이블카에 오르면 근심은 남의 것, 즐거움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된다.시공초월, 왕인의 숨결을 느끼다!, 왕인문화축제왕인문화축제는 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다. 길 옆으로 100리를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을 보노라면 시작부터 마음이 설렌다. 그 길의 아름다움은 건설교통부가 별도 인증했을 정도다. 월출산의 기암괴석과 청보리가 벚꽃과 몸을 섞는 영암 100리 벚꽃길을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했다. 벗꽃길이 왕인문화축제의 간판이다.축제의 메인인 왕인박사유적지는 일본 아스카(飛鳥)문화의 원조가 됐던 왕인박사의 자취를 시공을 초월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유적 입구 천인천자문 조형물은 서체가 다양하다.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파한 왕인박사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한·중·일 명사 1000명이 쓴 글씨를 석공이 돌에 새겼다. 왕인의 일대기를 다룬 부조 석상과 기록화도 만날 수 있다. 왕인박사 생가를 거쳐 망월정에 오르면 영암 월출산 능선과 구림마을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왕인이 8세 때 입문해 공부했던 문산재, 동료들과 담소를 나눴던 양사재, 서재로 이용했던 책굴도 오랜 기품을 품고 있다. 인근을 흐르는 계곡물은 성천이다. 문산재 아래 터와 왕인탄생지 바로 옆쪽에서 성천수를 마실 수 있다. 이 물을 마시고 목욕하면 성인(聖人)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왕인문화축제는 수많은 행사들로 왕인의 삶을 기억한다. 왕인이 일본으로 떠나는 모습을 재현할 때면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에 빠져든다. 왕인문화축제에 가면 볼 것도 먹을 것도 많다. 천상의 바위예술관이라 불리는 ‘월출산’과 천연 자연 풀장인 ‘기찬랜드’가 여행객을 반긴다. 영암 매력한우와 개펄에서 잡은 낙지를 탕으로 끓여낸 영암의 갈낙탕은 전라도 최고의 별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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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으면서 다른 세 개의 찻잎 풍경, 영암 덕진차밭·강진 월출다원·해남 설아다원
차밭이라고 다 같은 차밭이 아니다. 개별로 보면 같은 차나무이지만 모여 차밭을 이루면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하루해면 둘러볼 수 있는 영암의 덕진차밭, 강진 설록다원과 해남 설아다원은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한 번 나선 차밭 투어에서 만나는 세 가지 풍경에 마음이 부자가 된다.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하루쯤 푸른 고즈넉함 속에 묻히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 하염없이 펼쳐진 차밭은 근심을 날려준다. 마음이 편안하다. 그 차밭 근처에 누워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시간이 10년쯤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해도 크게 아쉬울 거 같지 않은 그런 편안함이다.덕진차밭은 차밭 자체보다 저 멀리 월출산이 액자처럼 아름답다. 월출다원은 드넓은 녹차의 푸르름에 반하고, 월남사지3층석탑에 기대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설아다원은 조금 별종이다. 유기농 차밭은 덤이고, 온갖 체험과 주인장의 판소리 가락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월출산을 배경으로 끌어다놓은 덕진차밭덕진차밭은 영암에서는 가장 크지만 다른 지역의 이름난 차밭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차밭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5만여 평 규모다. 백룡산 자락을 등 뒤에 두고 차나무들이 정겹게 붙어 앉아 있다.덕진차밭이 규모보다 훨씬 크게 느껴지는 것은 월출산 덕이다. 그 차밭 데크에 앉아 영암읍을 내려다보면 아름다운 ‘선경’이 펼쳐진다. 진경산수화 한 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월출산의 기암괴석들이 이 세상 풍경이 아닌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다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끌어다 놓았으니 덕진차밭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계절 구분 없이 차밭과 어우러진 월출산 풍경을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날랜 걸음을 준다. 덕진차밭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이른 아침과 해질 무렵이다. 아침에는 차밭과 월출산이 안개를 품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품어낸다. 해질녘은 역광이 산란한다. 월출산 뒤로 지는 해가 하루 마지막 빛을 품어내면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 현실 안에서 연출된다.덕진차밭은 한국제다가 운영하는 차밭이다. 품질 놓은 녹차가 생산된다. 덕진차밭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주변에 야생차밭이 존재했다. 한국제다가 그곳에 차밭을 일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백룡산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사시사철 차나무를 감싼다. 특히 낮 동안 따사로운 햇살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남향이다. 90%가 재래종 차나무로 마시면 속 깊이 퍼지는 우아한 맛을 낸다. 아름다운 월출산을 마시는 느낌이다.월남사지3층석탑에 기대 선 월출다원월출다원은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아름다운 숲이다. 키 작은 차나무들이 이룬 숲은 넓고 또한 의미가 깊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인 장원 서성환 회장이 설록차의 대중화를 위해 1982년에 조성했다. 10만평이 넘는 부지에 심어진 차나무들은 사철 푸르름을 발산한다. 저 옛날, 차문화의 중심은 언제나 절이었다. 지금은 복원공사가 한창이지만 터만 남아있던 월남사지 주변은 원래부터 재래종 치나무가 지천이었다.월출다원의 차나무를 키우는 것은 8할이 월출산이다. 산은 자주 안개를 끌어와 차나무를 덮는다. 습한 안개를 자주 만나는 차나무들은 떫은맛을 덜어내고 깊고 담백한 향을 키운다. 아침마다 찻잎을 타고 흐르는 이슬은 월출산이 내린 안개의 다른 모습이다. 그 차 한 잔에 결국 월출산이 담겨 있는 것이다.월출다원이 더 아름다운 것은 월남사지를 품고 있어서다. 월남사지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추정의 역사다.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고려 후기 진각국사가 창건했다는 것, 한때는 지금의 월남마을 전체가 절의 영역이었다는 언급 정도가 고증된 사실이다. 다만 선명한 것은 월남사지삼층석탑뿐이다.탑은 경이롭다. 다른 모든 것은 ‘시간의 재’로 남았는데 오직 삼층의 석탑만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진각국사비도 위의 절반은 몸체에서 떨어져 나갔고, 남아있는 앞면 또한 글자 한 자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을 지워버린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을 탑은 어떻게 건너왔을까? 월남사지삼층석탑은 담백하다. 단조로운 선들이 모여 탑을 이룬다. 보는 각도에 따라 탑의 위용이 변하는데 월출산과 겹쳐 보면 바위 한쪽이 되고, 그 반대편이라면 푸른 차나무들과 하나로 섞인다. 탑을 이룬 석재의 선에서 긴 여백이 느껴지는 탑이다. 사람으로 따지면 여성과 남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인데 늘씬하면서 우아하고, 또한 강렬하다. 전형적인 백제의 석탑 양식이다.차밭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설아다원두륜산 남쪽 자락에 만들어진 1만여 평의 설아다원에 서면 차향기보다 사람냄새가 더 깊다. 원래는 헐벗은 산비탈이었다. 오근선·마승미 부부가 20년이 넘는 시간을 하루 같이 차밭을 일궜다. 그 고된 노동의 시간이 쌓여 지금의 설아다원 풍경이 완성됐다.차나무만 심은 게 아니다. 울타리에는 목련나무나 다래덩굴 같은 나무를 심어 보는 눈들을 풍성하게 했다. 차밭 사이사이 단풍나무, 때죽나무, 녹나무, 후박나무 등을 식재해 계절감을 살렸다. 그네를 매달고, 썰매장을 만들어 아이들 놀거리도 함께 제공한다.설아다원은 눈으로만 보는 차밭이 아니다. 쉼과 체험을 통해 오감으로 느끼는 차밭이다. 설아다원은 어린 찻잎을 한 잎 한 잎 손으로 따고 선별해 솥에 덖고 비비고 말려 차를 만든다. 그 과정에 동참해 직접 만든 차를 우려 맛을 음미한다. 감나무잎차, 녹나무잎차, 쑥차, 목련차도 맛볼 수 있다. 숲 해설사인 주인 내외와 함께 차밭을 거닐며 식물들의 삶도 전해 듣는다. 흙으로 만든 펜션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도시에서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진다. 차밭 아침산책은 고즈넉함의 끝을 맛볼 수 있다.무엇보다 남도의 ‘흥’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마승미 씨의 남도민요와 판소리 공연은 일품인데, 흥이 동하면 밤새 가락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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